신은 자연을,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근대서울도시계획의 맹아-대한 제국기/도심부 공간의 식민화-경성시구개수/도시계획법의 제정-조선시가지 계획령/복제와 확장-경성시가지계획의 기본구상/ 시가지 계획의 지연과 ‘통제’ 이데올로기/새로운 공업지역과 주거지역의 형성/철거와 저항-도시계획과 빈민주거 박탈/빈민주거대책의 가능성과 한계/주택문제의 심화와 공고주택 건설/나오며
서울의 근대적 도시계획을 통한
도시공간과
사회적 변천사
신은 자연을,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도시 계획이란 자연의 정복과 개조라는 근대적 이념과 맞닿아 있다. 도시계획은 흔적을 남긴다. 권력자가 바뀌어도, 그 권력의 흔적은 도시에 나이테처럼 남아 있다. 서울은 조선 시대 유일의 도시였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서울은 긴 시간 동안 ‘도시 중의 도시’였다. 일제는 서울을 조선의 수도가 아닌, 일본 제 7의 도시로 규정했지만. 그래도 서울은 역시 수도였다. 일제는 서울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식민지 수도의 위상에 맞는 사업을 시행했다. 특히 1930년~1940년대의 경성시가지 계획은 서울을 대상으로 실시한 최초의 근대적인 개념의 종합 도시계획이었다.
일제는 서울을 도시계획의 연습지로 삼았다.
“현대 도시계획의 의의는 무엇인가?, 19세기 도시는 중산 계급의 도시로서, 19세기 도시계획은 중산 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키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현대도시는 민중의 도시로, 시민 전체의 편익 증진, 공익의 추구라는 목적이 가미되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는 시민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는 경성부 공영부장이 한 말이다. 일제는 조선이 선진적 도시계획 제도를 시행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았다. 식민 본국에서는 토지소유자들과 도시민들의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도시계획을 시행하기 어렵지만, 식민지에서는 강압적 통제가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시가지 계획령’이 1934년에 시행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는 1962년까지 폐지되지 않고, 계속 존속되었다.
도시 계획에 따른 땅 투기 열풍
시가지 계획은 도로망의 확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도로망 완성은 25년간의 연간사업을 진행되도록 계획되었다. 도로망 부설에 이어, 구획정리사업도 계획되었다. 사업별로 구획을 정리한다는 소문이 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