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식민지 통치에서는 숫자 사용의 확대를 가져온 사회적 요구들을 제국주의의 물리적 폭력으로 질식시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숫자 사용에 필요한 사회적 준비와 조정 없이 따라서 관련된 제도적 장치와 인식의 형성을 결여한 채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실행되었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숫자 사용이 생산의 제고, 효율적 분배, 재생산 기제의 안정적 유지, 사회적 위험 관리 등을 목적으로 했다면, 식민지에서의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민과 자원의 수탈과 통치의 효율을 겨냥했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구미 나라들보다 뒤늦게 식민지 침탈에 가담한 일제는 1910년 조선을 침탈한 후 인구, 토지, 산업 등에 대한 여러 형태의 대규모 경제조사들과 사회조사들을 실시하고 기록하면서 수량화와 계수화를 광범하게 도입했다. 그것은 식민지 수탈과 동원을 위한 사람과 자원에 대한 정보 수집의 도구였을 뿐 아니라, 조선의 기존 사회질서를 식민지 통치에 적합한 수량화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것으로 굴절하고 재편하며 인민을 길들이고 정당화하는 장치였다. 식민지 통치는 조사 항목들을 통해 인민의 삶의 영역들을 변경하고 수량화와 계수화를 통해 그것들을 계산 가능하고 관리 가능한 것으로 주조했다. 게다가 일제는 이 과정을 행정기구와 헌병경찰을 동원해 폭력적·돌진적으로 강제함으로써 숫자 사용을 협상하고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회적 변동으로 만들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군부 쿠데타 세력이 주도한 압축적 경제성장 과정에서 숫자 사용의 형태와 내용을, 아마도 수탈과 동원의 목적의 순위는 바뀌었겠지만, 더욱 강화하고 확대했다. 권력자들과 (그들의 대리인이나 손발 노릇을 하는 전문가들은 수량화를 식민통치의 도구로 사용하던 유산을 답습하여, 자신의 권력행사에 적합한 숫자 생산의 규칙을 선제적·일방적으로 제정하고 강제하면서 그렇게 생산한 숫자를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압박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에서 숫자는 민주적이고 합의적인 성격은 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