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준관 목사 이력
1막 회심(回心, metanoia
1장 | 출생, 주일학교, 해방(1933~1947
2장 | 해방, 부도덕한 동네의 변신
2막 38선
3장 | 민족 분단과 동광중학교
4장 | 혹독한 운명의 장난
5장 | 서울농업중학교 그리고 수표교교회
3막 전쟁과 평화 I
6장 | 6·25 전쟁
7장 | 고향, 만남, 세 번째 탈출
4막 전쟁과 평화 II(1951~1953
8장 | 학도유격대(Donkey 11연대 통신대장
9장 | 전쟁 이야기 I ― 용호도전투
10장 | 전쟁 이야기 II ― 창린도전투
11장 | 전쟁 이야기 III ― 기린도의 1개월 그리고 대반격
5막 하나님의 이끄심(1952~1960
12장 | 그토록 싫었던 신학생이 되다
13장 | 3대 경사(1955~1957
14장 | 다시 군인(군목이 되다
6막 아메리칸 드림(1960~1968
15장 | 듀크대학교 신학대학원(1960~1962
16장 | Parcific School of Religion(Berkeley, Ca.(1962~1964
17장 | 시카고한인감리교회(1964~1968
7막 귀국, 감리교신학대학 그리고…(1968~1975
18장 | 귀국, 역문화(逆文化 충격
19장 | 전환기의 감리교신학대학
20장 | 감리교회 부패와 분열
8막 정동제일교회(1975~1979
21장 | 정동제일교회의 청빙
22장 | 신앙의 유산, 잠재력, 수요성서 연구
23장 | 장기 선교 계획안
24장 | 선교100주년기념교회 건축, 감리교의 재통합
9막 연세대학교(1979~1999
25장 |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그리고 교목실장
26장 | 신과대학장, TBC 성서 연구(1988~1992
27장 | Iliff School of Theology International Academy of Practical Theology
― TBC 성서 연구회(1992~1999
10막 실천신학대학원
책 속으로
1949년 12월 말, 성탄절과 연극은 모두 끝나고,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가는 하얀 눈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허탈감과 외로움도 있었지만, 나는 공산당에게 한순간에 집과 재산을 모두 잃고 온 가족이 거지가 되어 죽음을 헤매던 5개월의 운명으로부터 불과 6개월이 지난 후, 서울 한복판에서 온 가족과 함께 생명을 유지하고, 서울농업중학교 우등생이 되고 또 수표교교회의 한 주역이 된 이 신비로운 진행을 음미하고 감사하는 눈물을 흘리며 눈 속을 걸었다. 그것은 인간의 운명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경륜’하심이 아니었던가!
2막 38선 중에서
학도유격대! Donkey 11! 나의 생명을 살려 준 고마운 부대였다. 그리고 미력이나마 나라를 지키고 동료를 지켜낸 내 젊음의 빛나는 시간(highlight이었다. 여기서 인생을 배우고, 하나님의 신비와 인도하심을 경험한 믿음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18살, 19살 나이의 통신대장! 그것은 자랑스러운 나의 이름이었다.
4막 전쟁과 평화 II 중에서
김애선과의 만남은 연애로 이어지고, 우리는 애인의 관계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같은 신앙, 같은 피난민 그리고 신학생과 목회자 자녀라는 공통점이 우리를 하나로 연합시키는 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1949년 고향 잃음, 1950년 625 그리고 1951년에서 1952년 학도유격대로 이어진 전쟁, 가난, 배고픔, 죽음의 골짜기에서 상할 대로 상한 내 영혼 앞에 김애선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김애선과의 만남은 새로운 삶의 활력으로 변하고, 목회자의 소명으로까지 이어주는 모멘텀(momentum이 되고 있었다.
5막 하나님의 이끄심(1952~1960 중에서
짧고도 긴 정동교회의 4년 반 목회! 정동제일교회의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 축복이었다. 그리고 더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내 신앙과 신학은 더 이상 책상과 책에서 나오는 신학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