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마네의 죽음
‘여인의 화가’
말년의 열정
마네 사후
2장 아방가르드
쿠튀르와의 불화
바티뇰 그룹의 리더
인상주의와의 관계
아방가르드의 길
3장 상상력과 스타일
‘올랭피아 스캔들’
〈올랭피아〉에 대한 다양한 시각
마네 스타일
〈올랭피아〉 패러디
4장 형식의 문제
형식주의 비평의 계보
현대미술의 탄생
푸코의 마네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반연극적 전통’의 붕괴
형식주의 비평의 제한성
5장 주제의 화가
보들레르, 졸라, 말라르메
‘현대생활의 화가’
진보의 이면
6장 미술과 정치
마네 이전의 정치화
종교의 세속화
나폴레옹 3세에 대한 공격
파리코뮌과 마네
공화주의자
찾아보기
사후에야 제대로 평가를 받은 현대미술의 거장 마네
마네는 세상을 떠난 후에야 살아 있을 때는 받아보지 못한 후한 평가를 받는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먼저 그의 동료가 앞장서 마네를 높이 평가했다. 마네와 다툼이 잦았던 드가조차 “그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뒤레, 프루스트, 모리조 등은 마네의 유언집행인이 되어 1884년 1월 미술학교에서 추모전을 개최했다. 이 추모전은 마네의 예술세계를 재평가하는 최초의 전환점이었다. 〈올랭피아〉를 비롯한 대표작을 포함해 유화, 수채화, 파스텔, 연필화, 동판화와 석판화 등 총 179점이 전시되었다. 에밀 졸라는 카탈로그 서문에서 마네를 “쿠르베 이후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새로운 기법으로 빚어낸 최초의 화가”로 소개했다. 마네 생전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많은 비평가와 대중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추모전이 열린 해 평론가 에드몽 바지르는 『마네』를 출간하기도 했다.
마네의 그림은 1886년 뉴욕에서 소개되었으며, 1889년 만국박람회에 때맞춰 열린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 회화전에서는 프루스트가 마네 그림을 명예관에 전시하도록 힘썼다. 이 전시를 계기로 미국과 독일의 애호가들이 마네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20세기 들어 앙리 마티스, 피카소, 르네 마그리트 등은 마네를 선구자로 받들었다. 탄생 100주년인 1932년과 사후 100년인 1983년 두 차례의 회고전을 계기로 마네는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추앙되었다. 조르주 바타유, 미셸 푸코, 클레멘트 그린버그, 마이클 프리드 같은 저명한 비평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마네가 현대미술의 창시자라고 주장했다. 살아생전 세상과 대중과 불화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마네의 예술세계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아방가르드, 문화관료와 대중과의 불화
마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의 길을 택했으며, 당대 역사화의 대가 쿠튀르의 문하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마네는 스승 쿠튀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