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1. 가장 멋진 죽음
2. 코로나 회의주의
3. 이른바 ‘생명의 신성화’라는 것에 대하여
4. 앙투안 르베르숑과의 대담
5. 서기 2000년의 궤변
6. 마스크와 거짓말
7. 노골적인 선별
8. ‘생물학적 생명’: 위대함과 퇴조
9. 태풍의 눈 속에서의 죽음
10. 생명의 가치
11. 국소세계에서의 죽음
12. 코로나 회의주의, 4개월 후
13. 문제의 파국주의
추신: 도전의 함정
감사의 말
책 속에서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미국과는 다르게 지식인들 절대다수, 특히 철학자들 절대 다수가 외곬으로 문학 교육만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과학과 기술을 독毒이라고 비판할 의무가 있다고 믿고, 자신들이 반드시 필요한 해독제를 주고 있다고 믿는다. 그 관점에서 보면, 그들에게 길을 터 주었던 이들은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였다.
- p.23
복음서에는 예수의, 어쩌면 의미 없어 보이는 끔찍한 문장이 있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라”라는 문장이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깊이 생각해보면, 이 문장은 대단히 심오하다. 죽음은 오직 죽음 자체의 문제이고,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죽음은 블랙홀과 같아 결코 빨아들인 것을 토해내는 법이 없다.
- p.30
아감벤은 기괴하게 들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이, 격리로 인해 “인류와 야만을 가르는 억제선이 무너졌다”고 단언했고, (4월 중순의 일이다 “어떻게 한 국가 전체가 그저 단순한 질병 앞에서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면서 정치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무너지는 일이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공동체살이의 보전보다 ‘벌거벗은 생명’을 우선시하는 사회는 죽음보다도 끔찍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사회라고 말했다. 아감벤이 놓치고 있지 않나 싶은 것은, 그의 고담준론이, 트럼프의 말에 감히 대들면서 시민들에게 마스크 착용을 강요하는 주지사들을 협박하기 위해 손에 무기를 들고 국회의사당 계단 앞에 서서 고함을 지르는 미국 극우파 집단들의 말과 합류한다
는 것이다.
- p.59~60
‘복잡성’이라는 말은, 그 말을 대중화하려는 어중이떠중이들이 그것과 혼잡성complication을 혼동해서 크게 변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모두가 복잡성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잊고 말았거나 전혀 알지도 못했다.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이라는 한 수학의 천재는 1948년에 열린 힉슨 재단 심포지엄에서 ‘복잡성’이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는 가설의 형태로 명명한다. 어떤 복잡한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