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일제가 ‘국악’을 억압하고 말살하려 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맞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만들어진 서사이기도 하다. 일제는 조선음악의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려 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오늘날 ‘국악’은 정부수립 이후, 특히 국립국악원 설립 이후의 언어이다. 해방 직후 조선음악이 국악이 되었지만 이때 국악은 지금 개념의 국악과 내용성이 다르다.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정통성 차원에서 국악의 의미변화가 이루어지고, 아악부라는 특정 그룹들만의 폐쇄적 언어로 의미가 전화되었을 때, 그러한 소수 특정 그룹의 친일역사 지우기와 기득권 유지 강화를 위해 날조된 서사가 바로 일제가 국악을 억압했고 그러한 억압된 상황에서 아악부원들은 국악을 지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는 식의 설명이다. 아악부는 국립국악원 설립 전까지 ‘국악’을 위해 애쓴 적이 없다. 국립국악원 이전 국악은 일제강점기 당시는 일제 군국주의적 음악이었고 해방공간 국악은 민족음악 모색의 언어였다. 국립국악원 설립 이후 국악이 휴전선 이남 대한민국 국립기관의 언어가 되었을 때, 마침내 국악은 현재학이 아니라 과거학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악부를 국악과 동일시하고 이를 국가와 동일시하는 사고관습이 구축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국악의 폐쇄성과 과거지향성은 일제의 산물임과 동시에 정부수립 이후 아악부 출신 인사들의 지배적 영향의 결과이기도 하다.
아악부원들의 자기 역사 지우기는 현대사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지식과 기억의 독점에 의해 성공할 수 있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일제의 음악적 식민통치작업 성공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교육받고 활동했던 아악부원들에 의해 훗날 국악의 지식과 기억이 배타적으로 정리되었고 소위 국악사와 국악이론 역시 아악부원들의 세계관에 의해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 독점과 배제의 구조 속에서 아악부의 세계관과 욕망에 부합하지 않은 모든 역사적 사실들은 폄하되거나 지워졌다. 그러나 아악부를 통한 일제 식민통치의 결과론적 성공은 이제 그 파국을 선언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