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 시련 속에서도 꽃 핀 선비 중의 선비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우리에게 시련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정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정치의 핵심에 오르지 못했고, 늘 정적들의 견제?와 질시를 받으면서 살얼음판을 딛는 듯 위태로운 생활을 했고, 사랑하는 가족을 곁에 두지 못하고 혹독하고 시린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도 시름에 젖지 않고 방대한 양의 저서를 집필하며 학문을 완성했다. 곧고 굳은 성품이 아니었다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그를 우리는 단연 선비 중의 으뜸으로 자리매김하며 본받고자 노력해야 ...
- 시련 속에서도 꽃 핀 선비 중의 선비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우리에게 시련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정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정치의 핵심에 오르지 못했고, 늘 정적들의 견제와 질시를 받으면서 살얼음판을 딛는 듯 위태로운 생활을 했고, 사랑하는 가족을 곁에 두지 못하고 혹독하고 시린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도 시름에 젖지 않고 방대한 양의 저서를 집필하며 학문을 완성했다. 곧고 굳은 성품이 아니었다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그를 우리는 단연 선비 중의 으뜸으로 자리매김하며 본받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 격변기 사회에서 보수 세력에 대항하는 실학자들의 혁명
성리학이 학문의 중심이었던 조선 후기, 농업 중심이었던 사회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천대를 받으면서 최소한의 수요만을 충당했던 수공업이 활성화되고 상업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양반들은 여전히 실생활과 동떨어진 학문에만 매달리고 있었고, 이런 학문의 풍조를 비판하며 젊은 실학자들이 대두했다.
이 가운데서도 단연 주목을 끌었던 이는 다산 정약용이었다. 정전제를 주장했던 중농주의 학파였던 그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들 썼으며, 이론에 그치지 않고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발명하며 실천했던 과학자이기도 했다. 천주교에 연루되어 떠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