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데즈먼드 투투,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해 싸운 화해와 평화의 사도
(광신대학교 이재근 교수
1. 새 시대의 시작
2. 용서를 향한 제3의 길
3. 때가 차매
4. 어떤 정의를 택할 것인가?
5. 용서의 물꼬를 트다
6. 피해자 청문회
7.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
8. 밝혀지는 과거사
9. 위원회에 닥친 위기
10. 그들만의 진실
11. 용서 없이는 참으로 미래도 없다
후기: 상처 입은 치유자
주(註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우리 모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었다.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우리 모두의 고통과 슬픔, 미래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보여 주었다.” - 넬슨 만델라 대통령
“투투 대주교는 인종 간 평등과 화해를 이뤄 냄으로써 복음에 헌신했다.” - 프란치스코 교황
“투투 대주교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멘토이자 친구, ‘도덕의 잣대’였다.” - 버락 오바마 대통령
“과거사의 진실을 통해 용서와 화해를 이루고자 했던 투투 대주교의 삶은 인류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문재인 대통령
남아공 인종차별의 역사
17세기 중엽 백인 이주와 더불어 시작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우월주의는, 1948년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프리카너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의 단독정부 수립 후 강화되어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인종격리 체제를 낳았다. 국민의 16퍼센트밖에 안 되는 백인이 84퍼센트나 되는 유색 인종을 무참하게 차별한 이 정책은 46년간 계속되다가 1994년 4월 27일 남아공 최초의 민주 선거가 치러지고, 그해 5월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 종식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4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을 법적으로 금하고, 인구등록법에 따라 백인, 컬러드인(흑백 혼혈, 인도인, 흑인이라는 네 개 인종으로 나누고, 집단지역법을 만들어 인종별로 거주지를 규정하여 강제 이주시켰으며, 유권자 분리대표법을 두어 유색 인종이 중앙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했다. 또 반투(Bantu교육법을 실시하여 모든 흑인 아동의 취학을 정부 통제하에 둔 뒤 흑인 아동들에게는 고등교육을 시키지 않고 급식도 제한했다.
이뿐 아니라 그들은 인종차별 체제를 지키기 위해 잔혹 행위를 수도 없이 저질렀다. 희생자의 목에다 타이어를 끼우고 석유를 가득 부은 뒤 불을 지르기도 했고, 노인의 머리를 쇠파이프로 때려 살해하기도 했으며, 사람을 죽인 뒤 증거 인멸을 위해 시체를 태우면서 옆에서 바비큐를 즐기기도 했다. 고환을 꺼내 골프공 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