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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순례 씨 - 고래뱃속 창작그림책 44 (양장
저자 채소
출판사 고래뱃속(아지북스
출판일 2022-10-24
정가 15,000원
ISBN 9791190747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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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긴 하루를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자리에 몸을 누이고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이렇게 삶이 무거운 날에는 세상에 기댈 곳이 내가 베고 누운 작은 베개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날에 할머니, 당신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그러면 이제는 작고 구부러진 당신이 걸어 나와 나에게 등을 내밀어 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단단하고 포근한 당신의 등. 나는 이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솔솔 잠이 옵니다. 생각해 보면 당신의 인생은 나의 것보다 몇 배는 무거웠습니다. 가난하고 서러운 시절, 노동과 살림, 의무와 도리를 고스란히 등에 업고 당신은 매일을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계셨어요. 한시도 쉬지 않고 소리 없이 움직이며 자식이며 곡식이며 모든 생명을 어루만지셨지요. 당신의 손길이 닿은 곳은 늘 반질반질 윤기가 났고, 반듯하고 싱싱하고 건강해졌습니다. 힘겨움이 없지 않았고 슬픔이 없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은 날이 없었을 텐데, 당신은 그 세월들을 어떻게 살아 내셨나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저는 당신의 그 오래고 주름진 인생에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순례 씨에게 배운 것은
행복해지는 능력

다시 하루가 밝았습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오늘의 채비를 합니다. 이건 사실 할머니 당신의 뒷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배운 습관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해가 뜨면 몸을 일으키고 자리를 정돈하고 매무새를 돌보고 할 일을 하러 나서는 법. 그렇게 묵묵히 시간을 건너 다시 살 힘을 얻는 법 말이지요. 어푸어푸 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듭니다. 밥 한술을 크게 떠서 억지로라도 먹고 나니 허리가 펴집니다. 발끝에 힘을 모으고 헛둘헛둘 걸으면 볼이 발그레 몸에 온기가 돕니다. 답이 없는 문제도 길이 없는 길도 하나씩 건너 볼 기운이 생깁니다. 부모님과 학교와 사회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 살아가는 기술이라면 할머니 당신이 나에게 물려준 것은 행복해지는 능력인 것 같습니다. 달달한 믹스 커피 한잔, 어여쁜 꽃 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