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공동체 담론의 한계를 넘어
‘마주할’ 공동체를 향해
낭시는 동구권의 몰락과 교조주의적 맑스주의의 패퇴 이후에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 공산주의의 문제와 공동체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과제로 삼았다. 알랭 바디우가 그에게 “최후의 공산주의자”라는 명칭을 부여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낭시는 우리 시대에 여전히 개인주의를 넘어서는 공동존재와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취소될 수 없다고 본다. 낭시의 정치 철학의 독창성은, 공동체가 어떠한 종류의 구성된 사회(크든 작든 모든 동일성의 집단와도 일치될 수 없다는 주장 가운데에서 발견된다.
플라톤에서부터 교조주의적 맑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자주 이상적 공동체는 구축해야 할 사회로서 추구되었다. 과거 공동의 이익을 중심에 두고 기능했던 맑스주의적 공동체, 연합의 주체가 되는 곳을 중심으로 전체가 그를 재현하도록 만든 파시즘적 공동체는 모두 공동체에 대한 허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낭시의 비판 대상이다. 오히려 그가 우리의 주목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 내로 환원되지 않는 관계 또는 사회 내에서 고착되지 않는 ‘관계’ 자체이다. 그는 그 무위의 장소가 결코 어떤 구도?목적·기획·프로그램에 따라 규정되거나 고정되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라는 존재가 윤리적·총체적·사회적 가치를 담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어떠한 개념적·관념적 구도에도 종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낭시의 메시지는 사회가 동일성의 가치 기준에 따라 스스로 구조화되고 폐쇄적이 될 때, 즉 사회 바깥의 지정될 수 없는 무위의 관계를 망각할 때 필연적으로 파탄의 위험에 놓인다는 것이다. 또한 그 무위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존재 이유도 존재 목적도 나아가 어떠한 가치도 갖고 있지 않은 유토피아적 장소가 모든 사회의, 현실의 모든 정치적?경제적 관계의 중심에 보이지 않게(또는 모리스 블랑쇼의 표현을 따르면, “밝힐 수 없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토록 적극적인 ‘무위’無爲
낭시의 무위 개념은 아무것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