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으로서의 빈곤
―미궁과 진창 속 자기 자리를 찾아서
이 책은 빈곤을 과정으로 본다. 그 과정 속에서 ‘빈곤이란 무엇인가, 빈자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미결인 상태로 남는다. “어디에나 있다”고 했던 빈곤은 주변을 둘러보면 다시 “어디에도 없는” 것이 된다. 돈 없고 집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돌봐줄 이도 없는 상태, 물질적 결핍과 경제적 고립, 약자, 피해자, 수급자, 의존자 따위의 전형적 분류로 답변되어왔던 이 질문에 간단히 답하기를 부러 실패하고 내려진 답을 거듭 번복하면서, 빈곤은 빈자에게 그렇듯 독자에게도 과정이 된다. 그것은 어떤 과정일까?
도시 빈민, 공장노동자, 수급자, 불안한 청년, 농민공, 이주자, 여성, 토착민, 노예, 그리고 역사 이전부터 착취당해온 비인간까지…… 이 책에 소환되는 빈자에는 경계가 없다. 빈자의 외연은 이 사회의 통치 방식과 그에 연루된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계속 확장된다. 가난한 이의 생활을 일정 기간 지켜보고 그의 생애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다 보면 물질적 궁박함으로 표상된 빈곤이란 상태가 실은 실존의 결핍을 메우려는 끝없는 분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어진 조건이 어찌됐건 취약한 존재가 세계 속에서 진정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 그것이 빈곤이라고 20년간 빈곤을 연구해온 저자는 이야기한다.
“이 나라는 내가 진정으로 어떤 인간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117
이 책의 문화기술지에 등장하는 어느 청년 노동자의 말은 빈곤 과정의 본질을 정확히 꼬집는다. 이 사회에서 누가 빈자인지를 가려내고 그의 빈곤을 처리하는 것―그의 의존을 자립 상태로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어떤 인간인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빈곤 과정에의 동참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며, “별 볼 일 없는 일상을 함께 견디며, 그럼에도 누구든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내-자리를 확보할 자격이 있음을 서로 배우는” 것이 인류학자인 저자가 빈곤과 동거하고 빈곤을 정치적 의제로 소환해온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