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스스로 조국 근대화의 도화선이 되다
1부 도화선 | 나의 사업
1장 [어두운 시대를 밝힌 불꽃] 사업보국의 사명을 키우다
[01] 가난한 식민지 소년, 불꽃을 품다
소년을 키운 신학문과 신앙심|명문 경기도상에 입학하다|나라 잃은 설움이 폭발하다
[02] ‘다이너마이트 김’의 탄생
마침내 화약인의 길로 들어서다|조선화약공판의 지배인이 되다|미8군을 거래처로 삼다|국내 화약 생산의 꿈을 키우다|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지켜낸 화약
[03] 대한민국 화약산업을 개척한 선각자
삼백산업을 외면하고 택한 외로운 길|운명처럼 다가온 인천화약공장 복구|도쿄대 도서관에서 찾아낸 설계도|다이너마이트 국산화의 쾌거|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일등 공신 | 국민을 위한 선물, 연화
2장 [세상의 길이 된 신념] 한화 100년의 여정이 시작되다
[방산] 반세기 전 뿌린 K-방산의 씨앗
방위산업 진출의 계기가 된 1·21사태|국가 방위산업체로 지정되다|여수 제2공장 건설|K-방산에 이어 우주산업까지
[기계] 10년 적자를 감수하고 뛰어든 기간산업
‘사업’과 ‘사명’을 고민하다|화약 이외의 업종에 처음 도전하다|열차와 차량용 베어링을 국산화하다
[화학] 멀리 내다보고 한발 앞서 도전하다
선진 공법의 국내 최대 규모 PVC공장 건설|현암이 겪은 첫 번째 경영난|국내 석유화학 진출의 교두보가 되다
[에너지] 될 때까지 도전해 뜻을 이루다
눈앞에서 놓친 제2정유공장 사업권|국내 유일 수도권 정유사, 경인에너지 출범|세 차례 도전 끝에 완성된 석유화학 콤비나트
[호텔·낙농] 대의를 위해 꺾은 고집
본사 터에 지은 서울의 랜드마크|농가를 도와 국민 브랜드를 만들다
[육영] 인재를 키워 나라에 보답하다
일류 시설에 일류 교사로 꾸린 학교|반세기 만에 부활한 ‘북일’|2대에 걸친 육영사업
[이리역폭발사고] 절망의 끝에서도 놓지 않았던 사명
이루지 못한 또 하나의 꿈, 반도체|일생일대의 재난과 마주하다|아무도 예상하
“나는 해방된 조국의 화약계를 지키는 등대수가 되겠다!”
[사업보국] 스스로 조국 근대화의 도화선이 되다
해방 이후 조선 땅에는 돈 벌 수 있는 기회가 널려 있었다. 그럼에도 오직 화약만을 고집하는 현암에게 주변 사람들은 ‘위험하고 돈 안 되는 화약 대신 우리도 삼백산업에 참여해 한몫 보자’는 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현암은 흔들림이 없었다. 떼돈이 벌린다 해도 공익에 반하는 일이면 거들떠보지 않았고, 설사 공익에 반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소비성이거나 사치성 사업이라면 손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난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송충이요. 화약쟁이가 어떻게 설탕을 들여옵니까? 난 갈잎이 아무리 맛있어도 솔잎이나 먹고 살랍니다!”
1942년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한 이후 현암은 화약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했고, 화약을 지키기 위해 피난마저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화약이 실린 적재함에 올라 목숨을 걸고 공비가 출몰하는 길 위를 달리기도 했다. 그 바탕에는 ‘화약계를 자신의 손으로 지키겠다’는 변치 않는 신념과 ‘사업을 통해 국가에 보답한다’는 사업보국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의 노벨’이자 오늘날 한화그룹의 전신인 한국화약을 맨손으로 일군 불굴의 창업주 현암 김종희는 대한민국 화약산업을 본격적으로 태동시킨 근대 화약사의 산증인이다. 그의 이름은 한국 경제계를 빛낸 거목의 반열에 올라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발자취와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그런 현암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국 경제의 재건과 발전을 위해 새로운 길을 개척한 그의 선구자적 철학을 정리해 오늘의 독자들에게 전한다. 자신보다는 기업을 기업보다는 국가를 우선했던 현암의 사업보국 정신과, 화약처럼 정확하고 정직하게 쌓아 올린 그만의 ‘정도 경영’ 철학은 오늘을 살아가는 기업인과 비즈니스맨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나에게 사업은 조국을 지키는 역사적 사명이다!”
[사업확장] 신념으로 더 나은 세상의 길을 열다
현암은 창의와 혁신을 기반으로 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