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새 학교로 부임하여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아침 교실에 들어서던 나는 깜짝 놀랐다. 웬 낯선 남자가 아이들을 잡아놓고 강의 아닌 강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칠판에는 알 수 없는 영어와 한자가 뒤범벅되어 있었는데, 기가 막힌 달필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사법고시 공부를 하다가 정신이상이 되었다는 한 아이의 아빠였다. 그 후로도 그는 걸핏하면 학교로 찾아와 이상 행동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는 쩔쩔매며 부끄러워했다. 나는 사건을 짐짓 무심한 척 넘겼고, 아이가 놀림을 당하지 않도록 그가 굉장한 천재라고 말해주었다. 그것이 당시 교사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따금 생각한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아프게 했을까. 그는 단순히 고시에 실패한 충격으로 스스로 패배자의 낙인을 찍어버린 걸까. 아니면 드러낼 수 없는 또 다른 사연이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사는 시골에는 조손가정이 많다. 생활능력이 부족한 조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청소년이 되면서 또 다른 불안감에 시달린다. 점점 쇠약해져 가는 조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감과 자유롭게 날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래서 그들은 또래아이들에 비해 훨씬 탈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시쳇말로 흙수저로 태어난 아이들이 맨몸으로 냉혹한 현실에 던져졌을 때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가 그들의 손을 잡아준다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설령 누군가가 그들에게 손을 내민다 하더라도 그들을 이용하여 부당이득을 취하려는 자가 대부분일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게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그들은 스스로 이정표를 찾아 방향을 잡았다. 기나긴 삶의 여정에서 수도 없는 난관에 부딪히겠지만, 그만한 용기라면 잘 극복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본문> 中에서
“야, 너 진짜 투사 같아.”
연재가 배시시 웃었다.
“우리 진짜 싸워야 할지도 몰라. 우리나라 그렇잖아. 울어야 젖 주는 거. 가만히 있으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