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사를 대신해서
축하의 글
1장. 가족과 유년시절 1928. 05~1946. 06
가족과 성장배경
이화고등여학교 진학
2장. 힘들었던 의대 진학과 대학생활 1946. 09~1951. 10
여성으로서는 힘들었던 의대 진학
쉽지 않았던 의사의 길
한국전쟁 포로 생활과 생사를 건 탈출
전시연합대학에서의 교육과 졸업
3장. 마취과 전문의로의 길 1951. 11~1958. 08
의사생활의 시작?거제도 포로수용소 내 미군병원
짧은 방황?고아 구제사업에 헌신
마취과의(麻醉科醫로의 길?스웨덴 적십자병원 마취과
마취과 전문의로서의 선택?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병원
4장. 국립의료원 초대 개원 멤버 1958. 09~1960. 12
국립의료원 탄생과 마취과 초대 의료진으로서의 역할
국립의료원 초기 운영상황
국립의료원 최초의 한국인 마취과 의사
삶의 동반자와의 만남
5장. 덴마크 유학 1961. 01~1961. 12 / 1968. 05~06
코펜하겐으로의 유학길
코펜하겐 도착
코펜하겐 마취학 교육센터
전반기 교육 프로그램
후반기 교육 프로그램
덴마크에서의 생활상
한국에 왔던 동료들과의 재회
유학의 성과
보수교육(1968.05~06
6장. 국립의료원 마취과 최초의 한국인 과장 1962. 01~1968.02
1960년대 여성 전문의로서의 삶
마취과전문의 자격 취득 및 마취과학회 활동
국립의료원 한국인 최초의 마취과 과장
국립의료원 사직과 가톨릭병원 마취과에서의 근무
7장. 모교에서의 새출발과 헌신 1968. 02~1993. 08
모교에서의 새 출발
의료원 및 3개 병원의 마취과·수술실 기획
전문의 양성의 기틀 마련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
마취과학교실의 미래를 위한 헌신
8장. 은퇴 후의 일상 1993. 09~2010. 08
정든 모교를 떠나며
은퇴 후의 삶 그리고 영면
9장. 가족이야기: 부모를 따라 의사가 된 딸의 회고|김애리
한 집안의 장녀였던 어머니
아버지?
신정순, 한국 최초 마취과 전문의
신정순은 마취과(痲醉科라는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한 전문과를 담당하였고, 여성으로서 국립의료원 최초의 한국인 마취과장을 역임했다. 그는 구제 일본식 이론 중심의 의학교육을 받았지만, 졸업 후 의사생활을 미군 야전병원에서 시작해 미국식 의학 시스템을 경험했고, 이후 스웨덴 적십자병원에 근무하면서 의사 초년기를 보내 북유럽식 병원시스템에 익숙했던 인물이었다.
그 당시 세계적으로 부족했던 마취 의사 양성을 위해 WHO에서 주관한 덴마크 코펜하겐 마취의사 연수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서구의 선진 의학기술을 습득하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해당 연수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매년 1명씩 참여할 수 있었는데(해당 프로그램을 이수한 국내 의사는 10여 명 정도이다, 신정순은 최초로 WHO 장학금을 지원받아 코펜하겐으로 유학을 떠났던 의사였고, 1961년 1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한국 마취학 분야를 선도했다.
국립의료원 개원 당시, 스칸디나비아 측 의료인과 한국 측 의료인 간 가교역할
국립의료원이 문을 열자, 신정순은 본격적인 마취과 전문의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특히 한국전쟁 기간부터 1957년까지 파견되었던 스칸디나비아 측 의료진들 중 일부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가 국립의료원이 개원하자 다시 돌아와 일했기 때문에 스칸디나비안 측 의료진과의 진료경험과 병원운영에 경험이 많았던 신정순이 한국인 의료진과 스칸디나비아 측 의료진 사이의 가교역할을 도맡아 했으며, 국립의료원 초기 병원운영 안정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신정순은 국립의료원 개원 초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야만 했던 국립의료원 설립 초창기에, 한국 측 인력과 스칸디나비아 측 인력의 접점을 찾아 공통의 목표를 제시하고 함께 수행하는 데 있어서 많은 혼란과 어려움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정순처럼 서구의 의료진 특히 스칸디나비아(스웨덴 의료진들과 함께 근무했던 경험은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