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땅을 빼앗긴 농민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고 곧 전국적인 토지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선의 땅은 주인이 누구인지 문서에 확실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토지 조사 사업이 진행되면서 지주들의 땅은 점점 늘어났다. 조선 총독부가 주인 없는 땅이라며 몰수한 땅을 지주들에게 헐값으로 넘겼기 때문이다. 조선으로 이민 오는 일본인에게도 싼값에 땅을 팔았다. 토지 조사 사업 이후에 전라도 곡창 지대와 같은 곳에 일본인 지주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일본은 토지 조사 사업을 하면서 전국의 모든 토지에 값을 정하고 세금을 매겼다. 이 세금은 이전에 농민들이 내던 소작료보다 더 많아 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은 일본인 지주들에게 땅을 팔고 농민들은 다시 그 땅을 빌려서 소작료를 내고 농사를 지었다. 또한 일본인 지주가 늘어가며 지주로부터 소작지에 대한 관리를 위임받은 중간 관리인인 마름의 역할이 커지게 되었다. 「미역국」(송현주은 토지 조사 사업 이후 이러한 농촌의 수탈 현장을 잘 담아내고 있다. 하시모토라는 일본인 지주와 마름이었던 칠성아재, 소작을 지어도 먹고 살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소작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지주와 마름의 눈치를 보며 해산한 다음날에도 일을 하러 나가야 했던 우애 엄마의 모습이 식민지 시기 힘없는 농민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1920년대 무장 독립 전쟁의 길
일본의 지배가 시작되며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진 독립 운동가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해 자치 단체를 만들고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독립군이 연합하여 봉오동 계곡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에 일본은 대규모로 독립군 토벌 작전을 계획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 등은 백두산 지대로 이동하게 된다. 청산리 부근에 집결한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을 계획하고, 전투에 유리한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일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