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어떤 소년의 대결 4
1부 수렁에 빠진 소년들
살기 위해 돌멩이를 들었다 15
김성민(가명 구술 ㆍ홍은전 글
후기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에 관한 단상 34
살아 있는 자의 사망신고 41
김춘근 구술 ㆍ하금철 글
후기 기억 복원을 통한 ‘인간 선언’ 58
꿀수록 불행해지는 꿈 61
한일영 구술 ㆍ김유미 글
후기 예순의 소년이 겪은 울분과 억울함 87
열다섯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어요 89
이대준 구술 ㆍ하금철 글
후기 그와 함께 돌림노래를 부르겠다 108
2부 삶이라는 공식에 셈해지지 않은 삶
해일의 시간을 경험한 조개의 이야기 115
김성환 구술 ㆍ강혜민 글
후기 지독한 해일의 시간, 그 후 137
선한 사마리아인은 없었다 141
김성곤 구술 ㆍ하금철 글
후기 한 퇴로 없는 삶에 관하여 167
여기에 있는 나는 누구입니까 173
오광석 구술 ㆍ강혜민 글
후기 나에 대한 흔적 찾기 195
넝마주이 왕초가 만난 하나님 199
현정선 구술 ㆍ하금철 글
후기 살아 있는 하나님들과의 만남을 꿈꾸며 217
눈초리들의 감옥 221
김창호 구술 ㆍ홍은전 글
후기 듣는 사람이 있어 가능한 이야기 251
부록 선감학원 함께 알기 명랑사회, 거리의 아이들을 ‘정화’하다 ㆍ하금철 259
선감학원 연표 301
추천사 한국 사회가 거쳐온 야만의 시절에 관한 보고서 ㆍ김동춘 303
추천사 선감학원, 그 절망의 핵심을 직면하기 ㆍ최현숙 306
수용시설, 청산되지 않은 일제 잔재
강제수용시설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감학원 역시 일제의 부랑아 단속 및 수용 조치를 위한 감화정책과 함께 등장했다. 선감학원이 설립된 1942년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매진하던 시기로, 전시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강제수용된 부랑아들을 참혹한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선감학원도 그런 필요에 의해 세워졌다. 1940년 경기도지사로 부임한 일본인 스즈카와의 지휘하에 경기도가 현 안산시 소재의 선감도 전체를 매수하고, 선감도 주민 전체를 도외로 철거시킨 후 공식 개원한 곳이 바로 선감학원이다. 선감학원은 ‘총후의 꿋꿋한 황국신민’을 연성하겠다는 의지를 내걸고 수용된 원생들에게 일제에 대한 충성심을 강제하는 교육을 실시했다. 극심한 인권 유린과 노역을 견디지 못한 원생들 다수가 탈출을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사망하는 일이 빈발했지만, 선감학원은 굴하지 않고 ‘전시 동원’에 매달렸다.
일제의 악법은 해방 이후에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일제가 물러간 후에도 부랑인 단속을 위한 법령들의 효력이 유지되었는데, 사회적 불안을 잠재울 필요가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구호정책은 진지하게 고민되지 않았고, 오로지 추방에 초점이 맞춰졌다. 1947년 서울 사직공원 안에 설치된 부랑아보호소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서울시는 시청 사회과 직원으로 하여금 경관을 대동시켜 부랑아를 ‘취체’하는 활동을 벌였다. 서울의 미화를 위한다며 부랑아와 거지 900명을 한꺼번에 시내에서 300리 떨어진 철도 없는 곳으로 추방하기까지 했다.
이 보호소는 이후 1960년 서울시립아동보호소로 재개소해 대대적인 수용을 시작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당시 아동보호소에 수용된 인원 중 약 50퍼센트에 달하는 아이들의 실제 부모가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행정 당국은 부모를 찾아 아이들을 돌려보내기보다 지방에 분산 수용하는 데 열을 올렸다. 특히 1961년에는 목포, 광주, 대전, 충주, 인천 등으로 아동들을 대거 분산시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