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 스님의 속명은 백상규白相奎, 법명은 진종震鍾, 용성龍城은 법호이다. 1864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14세에 남원 교룡산 덕밀암德密庵의 혜월慧月 스님에게 출가하였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집으로 돌아왔으며, 16세에 해인사로 다시 출가하였다. 이후 대비주 수행을 비롯, 무자 화두 참구에 진력하였다. 그러면서 19세부터 23세에 이르기까지 네 번의 오도를 경험하는데, 4차 오도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오천추월(金烏千秋月, 금오산에 천 년의 달이요 낙동만리파(洛東萬里波, 낙동강에 만 리의 파도로다 어주하처거(漁舟何處去, 고기 잡는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가 의구숙로화(依舊宿蘆花, 예와 같이 갈대꽃에서 잠자도다”
21세에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혜곡禪谷 율사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는데, 이는 대은계맥大隱戒脈을 전수받은 것이다.
오도 이후 다년간 안거를 하면서 선어록과 경전, 율장 등을 공부하며 자신을 닦아 나갔으며, 한동안 자취를 감추고 보림과 중생교화의 철저한 준비를 위해 정진하였다.
다시 세상에 나와서는 선지식들과 법거량을 하는 등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하고 나서, 드디어 대중교화에 나섰다. 각종 선회를 개설하고 여러 사찰에서 법문하였으며, 특히 43세 때에는 해인사 대장경판 보수를 이끌었고, 46세에는 해인사 원당암에서 미타회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1911년 48세에 드디어 경성으로 올라와 도심포교를 시작하였다.
이후 그의 일생은 불교포교사, 선사, 율사, 독립운동가, 불교개혁운동가, 경전 번역가, 불교 저술가로서의 삶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임제법맥을 계승하여 여러 선원의 조실로 활동하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대중 선회를 개설하여 선풍을 진작하였으며, 계율이야말로 불교의 기본임을 강조하고 일본불교의 대처식육을 반대하는 건백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대각회를 창설하여 불교개혁과 민족불교를 지향하였으며, 삼장역회를 조직하여 각종 한문 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펴내는 일을 조직적, 지속적으로 하였다. 아울러 석가모니의 생애나 불교사상을 대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