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닐이라는 몸을 둘러싼
소리골, 레이블, 커버 디자인에 대한 탐구와 예찬
이 책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핸드폰만 건드리면 바로 음악이 나오는 시대에 바이닐이 계속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좋게 말해도 다소 시대착오적인 듯하다.”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이 축음기를 개발한 이후로 공기를 진동시킨 후 사라져버리는 소리를 붙잡아두려는 노력은 투쟁이자 놀이였다. 조금이라도 더 귀에 들리는 소리와 가깝게, 공연장에서처럼 몇 시간을 끊김 없이 듣기 위한 노력은 투쟁이었고, 그럼에도 한 면에 20분 정도의 소리만 담을 수 있다는 제약 안에서 이뤄진 온갖 음악적 실험은 놀이에 가까웠을 것이다.
깍지벌레의 체액과 분비물을 정제한 동물성 수지인 셸락으로 레코드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로 소리는 몸을 갖게 되었다. 발화되고 사라져버리는 것을 물성으로 붙잡는 것이 레코드를 만드는 작업이고, 어쩌면 그것이 레코드 디스크의 처음과 끝일지 모른다. 그런데 앞서 말한 이 책의 첫 문장과 같이 디지털 시대에는 굳이 이 몸이 필요하지 않다. 유튜브나 스포티파이에 들어가면 거추장스러운 몸을 탈피한 평생 들어도 다 듣지 못할 양의 음원을 너무나 쉽게 들을 수 있다. 실제로 2000년대에 이후에는 LP는 물론이고 그보다 좋은 음질로 많은 양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CD의 판매량 또한 급격히 줄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시 몸을 찾기 시작한다. 꾸준히 그 몸을 쓰다듬고 관리하며 들어온 LP 애호가들도 있지만, 디지털 음원이 더 익숙한 세대들도 원래 물성이 없는, 소리 그 자체의 특성과도 닮은 디지털 음원이 아니라 그것을 제약 속에 옮겨 놓은 LP를 찾고, 레코드숍이 다시 생겨나고, 음악가들 또한 기꺼이 제약 속으로 뛰어든다. 물리적 실체라는 것이 그토록 무서운 것인지도 모른다. 만지고 보는 데서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인간에게는 그 정도로 중요할지 모른다.
바이닐에는 몸이 있어서 가능한 것들이 있다. 바이닐을 감싼 커버 아트가 그중 하나다. 1940년, 포스터 디자이너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