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 90년대 하버마스 열풍의 사회학적 조명
1부 1990년대 하버마스 신드롬
1. 하버마스 열기의 부상과 소멸
2. 하버마스 네트워크 단계의 형성
3. ‘차가운 열기’ 현상의 해부
2부 딜레탕티즘과 학술적 도구주의를 넘어서:
프랑스 포스트모던 그룹의 교훈
1. 부르디외의 장이론과 친밀한 적대자 공동체
2. 친밀한 적대자 공동체 구축의 실패 요인
3. 68혁명 시기 프랑스 학술장의 구조변동
3부 하버마스 수용의 이원화:
제도권 학술영역과 비주류 학술운동권
1. 마르크스와 하버마스, 계승인가 단절인가
2. 80년대 학술공간의 이원화: 딜레탕티즘과 도구주의의 대결
3. ‘하버마스 없는 하버마스’ 수용
4부 하버마스 네트워크의 형성:
변혁주의, 주류이론가, 신진 하버마스 연구자 그룹
1. 하버마스 방한 행사의 두 얼굴
2. 90년대 학술운동권의 핵분열과 신진 연구그룹의 출현
3. 하버마스 방한과 네트워크의 완성
5부 하버마스 네트워크의 해체:
딜레탕티즘과 도구주의의 사이에서 분열된 학자들
1. 네트워크의 해체와 분위기의 냉각
2. 네트워크의 성격과 특징
3. 변혁주의 진영과 주류 이론가 그룹의 이탈
4. 신진 하버마스 연구자 그룹의 와해
글을 마치며- 하버마스 네트워크, 무엇을 남겼나
1.
1996년 4월 27일, 철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학문적 논쟁의 구심점이었던 하버마스가 한국을 방문했다. 언론의 취재 열기는 하버마스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2주간의 빡빡한 일정과 구름같이 몰려든 청중과의 만남은 그를 당혹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학계의 하버마스 열풍은 바로 그 순간부터, 하버마스가 한국을 떠나자마자 식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의 망이 결집된, 한때 정점에 이르렀던 하버마스 네트워크는 깊이 있는 연구와 논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해체되기 시작했다.
2.
한국 인문사회과학계를 강타했던 하버마스 열풍을 이끈 학자들, 즉 90년대 하버마스 네트워크를 이끈 주역들은 서울대 사회학과의 한상진, 계명대 철학과의 이진우, 한림대 철학과의 장춘익이었다. 이들은 하버마스를 한국에 본격적으로 수입하고 유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하버마스의 인기를 견인한 세 집단은 제도권에 속한 주류 이론가 교수 그룹, 학술운동 영역에서 성장한 변혁주의 그룹, 그리고 이들로부터 분리되어 하버마스를 통해 학술적 성취와 정치적 변혁을 동시에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새로운 지대를 창출하려 한 신진 하버마스 연구자 그룹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 그룹들이 견인한 “하버마스의 인기는 국내 학술영역에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열기조차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수많은 전공자들과 전문연구자들이 하버마스를 스스로 완전히 버렸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스캔들”이다. 하버마스를 중심으로 뭉친 철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들의 네트워크와 그들이 출간한 수많은 책과 논문은 하버마스 네트워크가 양적인 지표상 일정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신드롬으로 그쳤다.
3.
하버마스의 국내 수용과 관련해 기존의 학술적 접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로 한국 철학사 혹은 서양 철학 수용사에 대한 사상사적 접근에서 하버마스의 수용이 자주 언급되었다. 공통으로 지적되는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은 80년대에 마르크스가 금지된 상황에서 ‘우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