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결코 평범하지 않으며 독보적이기에 언제나 주목할 수밖에 없는 작품.” 과거의 전기작가와 비평가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또한 그들은 조형예술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자나 음악가로서도 동시대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재주 많고 매혹적인 청년으로 레오나르도를 묘사하곤 했다. 한편 이 만능 예술가의 전혀 다른 면모 역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예를 들면 레오나르도에게 당시에는 범죄로 여겨졌던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16세기에는 레오나르도의 천재성을 나타내는 단서 중 하나로서 동성애의 일화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견습 시절: 피렌체(본문 7쪽
레오나르도는 〈암굴의 성모〉로 밀라노에서 화가로서 확실한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편지를 통해 밝힌 궁정화가 지위에 대한 희망은 몇 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1480년대 중후반까지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어떤 일로 생계를 꾸렸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병사용 무기나 전투용 기계를 제작했다는 사실로, 그중 어떤 것은 꽤나 뛰어난 발명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요새 구축에 필요한 설비나 복잡한 방어용 기구, 또는 공격용 무기 등 많은 종류의 전투 관련 장비를 설계했다.
-새로운 출발: 밀라노(본문 33쪽
1487년에서 1490년 사이, 해부학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루도비코 일 모로의 궁정화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이곳에서 레오나르도는 궁정의 축제를 책임지고 관리했으며 결국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몇 년 동안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기마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유능한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날리며 자신의 가장 유명한 벽화인 〈최후의 만찬〉을 그린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밀라노의 궁정화가 레오나르도(본문 45쪽
그의 후기 드로잉은 결코 세월의 흐름을 드러내지 않는다. 거기에는 복잡한 알레고리적 요소 외에도 고양이, 용,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