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철학자’ 니체에 대한 ‘철학자’ 바디우의 독해 니체 반철학의 급진성에 주목하다
그러나 ‘철학자’인 바디우는 ‘반철학자’인 니체와 대화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바디우는 니체를 형이상학과 비극의 틀로 해석한 하이데거와 들뢰즈의 주장을 검토한 후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니체론을 펼친다. 먼저 니체와 혁명에 관한 바디우의 해석을 살펴보자. 바디우는 니체가 철학을 혁명의 경지로 가져가고자 노력한 사상가라고 평한다. 여기서 혁명의 의미는 기존 용례를 초과한다. 니체는 자신의 사유가 프랑스 혁명처럼 ‘새로운 달력’을, 즉 새로운 시대의 절대적 열림을 초래하기를 고대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프랑스 혁명보다 자신이 해낸 사유의 혁신이 더 위대하다고도 확신했다. 니체가 보기에 프랑스 혁명은 처음의 공언과 달리 ‘세계의 역사를 둘로 쪼개기’에서 크게 실패했다. 구 세계의 상징인 기독교적인 것과 완전히 단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니체의 사유, 즉 혁명적 급진성을 품은 사유는 ‘절대적인 단절’, 즉 ‘인류 역사를 둘로 쪼개는 균열’을 생산해내며 완전한 새로움을 도래하게 한다는 점에서 급진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바디우의 해석이다.
바디우는 니체의 사유가 프랑스 혁명과 모방적 경쟁 관계에 있다는 점을 근거로 니체에게서 ‘원元정치적’ 차원을 읽어낸다. 니체의 원정치적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를 긍정하는 일이다. 세계를 긍정함으로써 모든 잠재적 주권에 내재하는 긍정적 역량을 해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긍정하면 ‘있을 수도 있는 세계’를 긍정할 가능성도 열린다.
니체와 바그너 그리고 그리스 비극 예술과 철학에 관한 20세기의 가장 중대한 물음
철학이 대변하는 근대적 합리성을 거부하는 니체는 그리스 비극으로 나아간다. 바디우는 니체의 그 유명한 개념 ‘영원회귀’를 그리스 비극, 즉 위대한 예술로의 복귀와 연결한다. 니체에게 그리스 비극이 복귀해야 할 위대한 예술인 이유는 그리스 비극이 철학에 종속된 예술의 가능성을 다시 꽃피워 사유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