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더 당당해도 괜찮아 _04
| 1장 | 자신을 탓하지 않는 연습
밟아도 되는 꽃은 없다 _17
방치한 죽음, 기획된 애도 _24
어쩌다 아나운서 _30
이 시대의 “혐오를 조장하라!” _40
마녀사냥당하다 _48
| 2장 | 페미니스트가 망친 페미니즘
2차 가해라는 유령이 떠돈다 _59
해바라기센터를 아시나요? _66
손가락만 보는 사람들 _78
손대면 성희롱 _88
여가부 폐지, 자업자득 _95
페미니즘과 꼰대 _104
‘탈코’ 하지 않을 권리 _112
리얼돌과 딜도 _117
잔잔하게 오래도록 따뜻하게 _121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_132
| 3장 | 나만 로맨스라는 착각
착한 정치보다 유능한 정치 _141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그리고 이목지신 _149
혐오에 혐오를 더해서 _156
여성할당제? 남성할당제? _165
참 이상한 ‘자칭’ 보수주의자들 _171
누가 이대남, 이대녀를 가르는가? _180
내로남불, 어디까지 갈 건가 _186
소통의 시대? 불통의 시대! _192
| 4장 | 선택적 보도가 현실을 왜곡한다
정정하라, 그리고 당당하라 _203
기레기 혹은 외람이 _212
조중동, 차라리 정치색을 밝혀라 _221
병먹금 하실 게요 _228
밟아도 되는 꽃은 없다
글을 마무리하는 중에 ‘이태원 참사’가 터졌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 속에, 사회적 참사와 어이없는 죽음이 반복될 때마다 저자를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장면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비쳤다. 바로 무릎을 꿇는 희생자 유족들 모습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故 이지한 씨의 아버지 이종철 씨와 8년 전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인 이남석 씨는 모두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모두 희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 앞에서였다.
누가 누구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묻는 저자의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며 자신을 한탄한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를 인용해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아내는 현대인들의 자기 연민에만 집착하는 현상이 전체 생명 경시 풍조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함께 잘살아보자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지금 잘살고 못사는 것도 전부 자기 덕이자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수시로 좌절감을 느낀다고 덧붙인다.
현실로 돌아와 참사와 희생 뒤에 주판알을 튕기는 정치의 비열함에 조종당하는 무지를 꼬집는다. 사고와 참사, 희생자와 사망자를 구분하는 행태, 국론을 분열해 책임을 면피하려는 작태에 더는 놀아나지 말자는 것이다. ‘특정 진영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이슈로 둔갑하여 추모하는 것마저 눈치를 봐야 하는 사회 분위기는 분명 병리적이고 그 뒤에서 상처받는 이들은 희생자 유족들이며 나 또한 그들이 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라고 되묻고 있다.
검색창에 ‘박지희’를 치면 나오는 사건에 관한 진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조리
2020년 팟캐스트 〈청정구역〉에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 피해자에게 “4년 동안 뭣하다가 이제야 김재련 변호사와 나왔느냐”라는 발언으로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했다는 기사가 지금껏 저자 이름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교묘한 발췌와 아니면 말고 식 기사의 전형으로 장차 저자가 맞닥뜨리게 될 고난의 시작이었다. 이 사건의 진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