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서문
술자리에서 넓고 얕은 지식 자랑하기
일러두기
미리 보는 컬러 사진
1장 우리 조상도 외국 술을 마셔 보았을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와인을 마신 사람은 누구일까?
조상들의 외국 술 관능 평가
쇄국 정책의 벽을 뚫은 외국 술
[참고1] 와인 만들기
한국 와인의 시초는 프랑스 포도나무
최초의 한국 와인, 쌀포도주
조선 와인 피노 그리, 피노 누아, 보르도 누아
식량 부족이 만들어 낸 국산 포도주
국산 식용 포도로 만든 달달이 와인
힘내라, 한국 와인!
위스키는 유사길 샴페인은 상백윤 브랜디는?
위스키의 품격
관세를 적용한 수입 술
유사 위스키가 판치는 세상
위스키의 두 얼굴
[참고2] 위스키 만들기
사케와 고량주를 수출한 나라, 조선
주세령에 따른 조선의 술 분류
원조 나라에 수출한 청주(사케와 고량주
처음으로 맥주를 마신 하급 관리의 슬픈 역사
국산 맥주보다 저렴한 편의점 ‘만 원 네 캔’ 수입 맥주
조선 시대의 맥주
수입 맥주와 신문 광고
[참고3] 맥주 만들기
1900년 프랑스 사진엽서 속 우리 술
세계 최초의 엽서와 우리나라의 엽서
잘못 알려진 엽서 속 주막 사진
2장 한양에도 서울만큼 술집이 많았을까?
왕실의 술을 따로 만들었던 관청
궁궐의 술을 만드는 곳
물 대신 술로 먹는 약
조선식 전통주 코스 요리 ‘진연’
음식과 술의 조화
한식 코스 요리
한양에서 가장 핫한 술집을 찾아라
주막에 대한 오해
다양한 술집
한양에서 가장 핫한 술집
술의 도시 한양
조선에 탁주 빚는 사람만 삼십만 명이라니
‘국민술’ 타이틀을 빼앗긴 막걸리
한국인에게 막걸리란
[참고4] 막걸리 만들기
외국인의 눈에 비친 개화기 조선인의 술 문화
폭음이 허용되는 나라
외국인이 바라본 조선의 술
조선 사람들은 왜 술을 좋아할까?
[참고5] 소주 만들기
3장 시대에 따라 우리 술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조선 금주령, 전통주의 변화 그리고 술의 다양화
외국의 금주법
우리나라의 시
조선의 한양, 일제 강점기의 마산과 군산
술의 도시 한양, 조선에 탁주 빚는 사람만 삼십만 명
조선의 한양은 술의 도시였다. 한양의 술집을 묘사하는 특징은 주등이다. 영조 때는 상소문에 ‘술집마다 술 빚는 양이 거의 백 석에 이르고, 주막 앞에 걸린 주등이 대궐 지척까지 퍼져 있을 뿐 아니라, 돈벌이가 좋아 많은 사람이 술집에 매달린다’는 양조의 병폐를 보고할 정도였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한양 큰 거리의 상점 가운데 절반이 술집임을 지적하며 술집은 한양 어디를 가든 마주치는 하나의 풍경이라고 했다. 술의 과잉 소비로 양조용 쌀이 너무 많이 소진되어 쌀값이 뛰고 덩달아 물가도 오를 정도였다.
지금처럼 맥주나 다른 술들이 쉽게 유통되거나 알려져 소비되는 시대는 아니었지만 1915년의 《매일신보》 기사에는 ‘조선서 빚는 술이 얼마, 탁주 빚는 자가 삼십만’이라는 내용이 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막걸리를 마셨다는 것이고 또한 막걸리를 제조하는 사람만 31만 명이라니 엄청난 수인 것이다. 당시 인구를 1699만 명으로 추정하면 인구의 1.8퍼센트가 술을 만들었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이것도 성인을 기준으로 하면 술 만드는 데 관여한 사람은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다.
술의 도시 마산과 군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마산과 군산은 청주(사케의 도시였다. 마산은 쌀 수탈의 거점 도시로 일본인의 자료에 따르면 꽃의 도시, 술의 도시였다. 일본인이 쓴 책이나 관광 안내 팸플릿에도 무학산과 합포만, 벚꽃과 술이 환상적으로 그려졌다. 마산 최초의 청주 양조장은 1904년에 일본 거류민에 의해 설립된 아즈마주조장이다. 이외에도 많은 주조장이 설립되었고, 일제 강점기하에 내수용에서 시작하여 만주와 중국 대륙에 수출용까지 생산하게 되었다.
군산 역시 쌀 수탈의 전초기지였다. 일제가 도로를 포장하고 철도를 개설하며 군산을 호남 최대의 상업 도시로 성장시킨 이유는 호남평야와 논산평야의 쌀을 수탈하기 위함이었고 1909년 조선 전체 쌀의 32.4퍼센트가 군산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