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장. 껍질의 우화
조개껍질 아래의 목소리
방랑하는 껍질들
몸이라는 공간
이미지의 자리
2장. 텅 빈 오케스트라
세계를 재현하는 법
우리의 이미지
미디어의 동굴에서
노래하는 시간
3장. 배 속의 늑대
몸들의 정원
껍질들의 집
콘텐츠 농장
먹고 남은 것
4장. 돌, 씨앗, 흙
유령 행성에서 뛰어내리기
박힌 돌과 구르는 돌
얽힌 통로들
흙 또는 씨앗
보론. 껍질이 굴러간 자리에서
책 속에서
껍질 같은 것들은 지난 몇 년 사이에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자주 목격되었다. 얇거나 두껍거나 쭈글쭈글한 것들, 제대로 된 몸을 갖추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몸을 버리지도 못하는 딜레마 속에서 나름의 자세를 취하고 경로를 모색하는 사물들이 우글거렸다. 관람자는 그 배치를 이미지들의 모험이 상연되는 일종의 연극처럼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미지들은 전통적 분류 체계를 고수하기 어려운 오늘날의 물질적 조건에서 새로운 연합을 구성하려 애쓴다. 그러나 우리는 외부적 관찰자의 위치에서 한가롭게 그 분투를 구경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이미지들이 우리의 닮은꼴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껍질은 한쪽에서 보면 이미지의 몸이지만 다른 한쪽에서 보면 몸의 이미지다. 그것은 자족적이지도, 자립적이지도 않은 몸의 불완전함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껍질은 몸의 잔상이 사물화된 것으로서 또 다른 몸을 주조하는 거푸집이 될 수 있고, 이를 통해 과거와 미래, 여기와 저기의 몸들을 분절하고 연계하는 매개체로 작동할 수 있다. 만약 껍질을 하찮은 부산물이 아니라 변성을 수반하는 운송 수단으로 보고 그에 탑승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예기치 못한 곳으로 데려다줄지도 모른다.
--- p.16 ~17
우리는 통제에 실패하는 주체이자 통제를 회피하는 대상이다. 지구 전체를 조망하는 광범위한 데이터 시각화의 평면에서 우리 같은 개체들은 인간과 비인간을 불문하고 한 무더기의 입자들로 표시된다. 거시적 관점에서 우리는 미세먼지처럼 관측되고 바이러스처럼 억제되고 플라스틱 쓰레기처럼 규제를 벗어난다. 우리는 너무 많이 알려진 동시에 일일이 알 필요가 없는 것으로서 앎의 공백을 내포한 데이터의 껍질이 된다. 정말로 우리는 어떻게 재현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우리가 과연 재현될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불안이 은밀하게 깔려 있다. 이러한 재현의 위기가 발생하는 까닭은 세계가 더 이상 인간이 귀속되는 장소이자 인간의 성취를 보여주는 활동의 무대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가 인간의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