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기독교 신학 전통에서 하나님의 “편재”(omnipresence는 종종 형이상학적 속성의 하나로 여겨졌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에 관해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시고 유지하시는 분이시므로 그분은 그의 피조물을 지키시고 그들과 항상 함께 계시며,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긴밀하게 관여하신다. 이것이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임재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공간적인 의미에서 온 세상에 만연해 계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적으로 “그곳에 계시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인격적이며 적극적이다. 그분은 모든 순간에 모든 피조물과 함께 존재하기를 원하며 또 그렇게 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 함께 모든 순간에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이 근본적인 생각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성경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강조하긴 하지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으로서의 우리―개인이든 집단이든―와 관계를 맺을 때만 이것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편재”에 대한 성경의 증거로 종종 인용되는 시편 139:7-10도 단순히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는 사실을 단언하는 것이 아니다. 시편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어디로 가든지―심지어 우주의 가장 끝자락까지도―하나님은 거기서 그를 만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_1장 하나님의 임재의 계시
이 구절을 요한복음 1:14에 대한 우리의 해설과 함께 상고해보면 우리는 성육신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요한복음 1:14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리라는 예언자의 소망은 예수, 곧 새 성막 안에서 성취된 반면, 요한계시록 21:3에는 하나님 자신이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이야기만 등장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계속 읽어나가면 우리는 예수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