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01 소년, 비행기에 반하다
늦둥이 아들 | 처음 본 비행기 3| ·1운동의 열풍
02 비행사의 꿈을 이루다
오구리비행학교 | 비행사 면허 취득 | 현상우편비행대회
*최초의 조선인 비행사
03 조선의 하늘을 날다
고국 방문 비행 | 안창남 열풍 | 여의도비행장
04 대지진이 발생하다
고물 비행기 | 간토대지진 | 안창남의 생사 | 총독부의 입막음
*간토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05 일본을 탈출하다
학살 이후 | 잇따르는 망명설 | 혼돈의 중국 대륙 | 테러와 잠적 | 상하이 임시정부 | 임시정부의 분열
*임시정부와 비행기
06 조선 독립과 중국 혁명의 소용돌이에 갇히다
권기옥의 한숨, 안창남의 한숨 | 여운형| 조선 독립과 중국 혁명 | 궈쑹링반란
07 타이위안으로 가다
옌시산 | 장제스의 북벌
08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다
마석고개 차량 탈취 | 2차 신문 | 3차 신문 | 세 동지 | 안혁명
09 영원히 하늘로 떠나다
죽음의 비보 | 사망 원인 | 옌시산과 반장연합 | 이자해의 분노 | 타이위안에 세워진 묘비
*안창남과 비행사고
10 안창남을 기억하다
감사의 말
부록 1_ 안창남 연보
부록 2_ 안창남이 쓴 글
주
참고문헌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민족의 자존심이 짓밟힐 대로 짓밟혔던 1920년대 조선인들에게 안창남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일깨운 ‘유일한 숨통’이었다. 안창남은 당대 기준으로 지금의 류현진·손흥민·방탄소년단을 합친 것 같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 1919년 3월 ‘대한 독립 만세’ 소리로 전국을 소용돌이치게 한 3·1운동이 시작됐다. 이를 목도한 안창남은 무기력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대신 비행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과감히 일본행을 택했다. (… 안창남은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현실에 가슴 아파했고, 학살에서 비롯한 ‘트라우마’를 겪은 뒤엔 일본인 밑에서 비행기를 타며 ‘되는 대로 살아야 하는’ 현실에 괴로워했다. 결국 안창남이 택한 길은 막막한 중국 대륙에서 펼쳐질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_ <머리말> 중에서
조선의 하늘을 최초로 비행한 조선인 ‘천재 비행사’
“치여다 보면 안창남이요, 나려다 보면 엄복동일세”라는 노래 가사로 유명한 안창남은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미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비행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다. 안창남은 학창 시절 일본인 비행사의 비행과 미국인 비행사의 비행을 목격하고 비행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에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게다가 1919년 전국을 휩쓴 3·1운동을 목격한 이후 안창남은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긴다.
하지만 안창남이 처음부터 비행을 배운 것은 아니다. 안창남은 처음에는 오사카 자동차학교에서 자동차 관련 기술을 배우고 귀국해 잠시 운수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운수업을 접고 본격적으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향한다. 1919년 8월 도쿄 아카바네비행기제작소에 들어갔고, 약 1년 뒤 도쿄 오구리비행학교에 입학했다. 비행학교에서 3개월간 교육을 받은 안창남은 이후 일본에서 몇 번의 비행기사고를 당하기도 하지만, 큰 사고 없이 비행사로서 활약한다. 1921년 4월 오구리비행학교의 교관이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