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생애를 결정적으로 뒤바꾼 하나의 운명,《비극의 탄생》의 기원
“지금 내 안에서 학문과 예술과 철학이 함께 자라고 있다.
분명 언젠가는 켄타우로스를 낳을 것이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바젤 대학교 문헌학 교수로 임명된 니체는 대학 시절부터 이미 명성 높은 문헌학자로 촉망받았다. 그러나 1865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압도당했다. 이어 1868년 바그너와 처음 만나 쇼펜하우어와 음악에 대해 대화를 나눈 뒤 문헌학에 심각한 회의를 품고 철학 논문을 구상하게 된다. 그는 바그너 부부와 수시로 교유하며 1870년 여름부터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비극에 대한 문헌학적, 역사학적 탐구가 아닌 철학적 해석을 논한 글로서 《비극의 탄생》의 바탕이 되었다. 그 해 겨울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다듬고 축약한 원고 〈비극적 사상의 탄생〉을 들고 바그너 저택을 방문했고,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 바그너에게 생일 선물로 건넸다. 이 논고는 후에 《비극의 탄생》 전반부인 1~10장을 구성하는 요체가 된다. 이어 1871년 니체는 소크라테스주의에 의한 비극의 죽음을 다룬 강연 원고 〈소크라테스와 비극〉을 개정하여 〈소크라테스와 그리스 비극〉이라는 소책자로 자비 출판했으며, 이후 일부 수정을 거쳐 《비극의 탄생》 11장~15장에 수록한다. 이 해 니체는 《비극의 탄생》 후반부 집필에 매진하며, 이듬해인 1872년 새해 벽두에 출간 작업을 마무리하고 헌정사인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과 함께 《비극의 탄생》 초판본을 바그너 저택에 전했다.
이론적 세계관과 비극적 세계관의 영원한 투쟁
“예술의 발달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에 달려 있으며, 이는 번식이 두 성에 의존하는 것과 같아서 끊임없는 투쟁과 간헐적인 화해가 있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두 예술충동은 각각 ‘조형·영상·언어’와 ‘음악’을 충동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