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 내 아버지는 평양에서 돌아가셨다
1부 변화될 희망이 이제 생겼다
1장 참 ‘보르항’ 예수를 진짜로 믿자
2장 ‘사람 죽이는’ 이상한 종교
3장 성령께서 몽골에 교회를 세우시다
4장 초콜릿과 커피보다 맛있는 기적
2부 사랑은 이래야 정말 느낀다
5장 누군가 기도하면 누군가 살아난다
6장 밥과 스팸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7장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인생
8장 “먹어봐야 맛을 알지? 하나님도 그래”
3부 사람을 바꾸는 찬란한 열정
9장 ‘사랑과 결혼’이라는 이름의 순종 시험
10장 “내가 안다, 네게 사랑이 없다는 거”
11장 ‘소리 지르는 사람들’의 교회 개척
12장 몽골에서 북한 사람들을 만나다
4부 사랑하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13장 북한에 자신의 모든 걸 주고 온 사람
14장 사랑하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
15장 내 마음의 나침반을 자랑하다
16장 선교사를 후원한 교회가 받은 축복
5부 내가 없어지면 누가 남을까?
17장 “최 선교사님이 잘 가르치셨다”
18장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긴 사람들
19장 손자 교회들이 전달하는 선한 생명력
20장 이제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나가는 글 : 최순기 선교사님이 사랑한 성경
부록 : 몽골의 기독교 역사
추천사
(서문 들어가는 글 중에서
몽골이 외면할 수 없는 분
최순기 선교사님이 사망한 다음, 몽골에서 장례를 치르기까지 보름이나 걸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평양에서 죽은 외국인의 시신을 북한 정부가 내줄 수 없다는 입장 때문이었다. 특별한 ‘비밀’이 있어서는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전례가 없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최 선교사님이 집사로서 다녔던 LA영락교회의 고(故 김계용 목사님도 1990년에 평양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최 선교사님의 사인(死因도 같은 것이었다. 김계용 목사님은 북한에 묻히셨다고 들었지만, 나는 아버지마저 그렇게 되도록 둘 수 없었다.
나는 부고를 듣자마자, 선교사님의 가족과 함께 우선 몽골로 갔다. 우리는 북한 대사관, 미국 대사관, 중국 대사관, 그리고 몽골 정부까지, 접촉할 수 있는 외교적 통로를 최대한 들쑤셨다. 동생 최홍기 장로는 최 선교사의 유언이 담긴 편지를 북한 정부에 보내 ‘몽골에 묻히는 것’이 고인의 바람이었음을 알렸다.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던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s Rice도 이 일을 보고받고 시신 송환에 힘을 보탰다. 북한 주재 스웨덴 대사관은 몽골 주재 미 대사관의 시신 인도 요청 전달에 협조해주었다. 중국도 시신이 중국을 경유하는 데 동의하였다. 전례가 없다던 북한 정부도 의외의 국제적 관심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 일의 마지막 열쇠는 정작 몽골 정부였다. 몽골 정부가 최순기 선교사의 장례식과 매장을 몽골에서 하는 것을 처음부터 승인한 건 아니었다.
20세기 초부터 구소련의 개혁개방선언인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가 선포될 때까지, 무려 70여 년간 소련의 영향 아래에서 공산국가였던 몽골 정부는 외교적으로 남한보다 북한과 가까웠다. 당연히 북한 눈치를 먼저 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북한이 고향인 대한민국 사람이면서 미국 시민권자인 개신교 목사가 평양에서 죽은 복잡한 경우다. 공산주의 사상과 불교와 무속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는 몽골로선 자연스러운 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