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뽑은 문장]
이러한 사랑을 정당하게 비난할 수 있는 관점을 찾기란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가족애가 개인적 이기심을 넘어서게 해주는 첫 번째 단계 역할을 하듯이, 이러한 사랑은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게 해주는 첫 번째 단계가 됩니다. 물론 이러한 사랑이 순수한 자비charity는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의미의 이웃 사랑이 아닌, 그저 지역적 의미의 이웃 사랑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태껏 보아 온 한동네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이에게, 본 적도 없는 ‘인류’를 사랑하는 수준까지는 꽤나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_49쪽, ‘인간 이하 것에 대한 애호와 사랑’에서
동물에게는 함께라는 말을 써도 좋을 만큼의 인격성이 있습니다. 아직은 대부분 한 덩어리의 무의식적이고 생물학적인 충동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그 동물은 다리 세 개는 자연에, 나머지 다리 하나는 인간 세계에 디디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연결고리, 곧 대사大使와 같습니다. ... 개와 함께 사는 사람은 자연 세계와 벌어진 간격을 조금은 줄인 셈입니다. 그러나 동물이 이보다 안 좋은 형태로 이용될 때도 물론 많습니다. _95쪽, ‘애정’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을 수 있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입니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분명 아픔을 느낄 것이며, 어쩌면 부서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아무 손상 없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다면, 누구에게도?심지어 동물에게도?마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취미와 작은 사치로 조심스럽게 감싸 두십시오. 또 모든 얽히는 관계를 피하십시오. 마음을 당신의 이기심이라는 작은 상자 안에만 넣어 안전하게 잠가 두십시오. 그러나 (안전하고 어두우며, 움직임도 공기도 없는 그 작은 상자 안에서도 그것은 변하고 말 것입니다. 부서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깨뜨릴 수 없고 뚫고 들어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_207쪽, ‘자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