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삼국유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삼국유사』는 고대 한국의 파랑(波浪을 지나, 북국(北國 고려로의 통합과 재탄생을 그린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고(구려인이 되었고, 광활한 대륙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큰 그림을 남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연은 우리에게 과제를 남긴 것이다.
책 속에서
원광은 성품이 허정함을 좋아하고 말할 때 항상 미소를 머금었고 얼굴은 노한 빛이 없었다. 연랍이 이미 많이 들어 궁에 수레를 타고 들어갔는데, 당시 여러 선비들 중 덕의가 속하는 바도 감히 그의 위로 나가지 못하였다. 문장의 넉넉함은 한 나라가 쏠리는 바였다. 나이 80여 세로 정관(貞觀 연간에 죽었다. 부도는 삼기산 금곡사에 있다. 당전에 황륭사에 입적하였다고 하는데 그 지명이 분명하지 않고 황룡(皇龍의 오자로 의심된다. 분황(芬皇이 왕분사(王芬寺로 쓰인 예와 같다.
위의 당전·향전 두개의 문장에 의거하면 다만 성씨가 박·설이며 출가가 동·서라서 두 사람 같아 감히 자세히 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다 싣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러 전기에는 모두 작갑·이목과 운문(雲門의 사실은 없다. 그러나 향인 김척명이 잘못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가지고 원광법사전을 윤문하여 짓고, 함부로 운문개산조인 보양법사의 사적을 합해 기록하여 하나의 전으로 만들었다. 후에 해동승전을 편찬한 자는 잘못된 것을 계승하여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그때의 사람들이 많이 미혹되었다. 인하여 여기에서 분명히 나누고, 한 글자라도 가감하지 않고 두 전기의 문장을 자세히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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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617-686는 의상과 나란히 일컬어지는 신라의 고승으로, 속세 이름은 설씨(薛氏. 진평왕 39년(617에, 현재의 대구특별시에 가까운 경상북도 경산군 경산읍, 당시의 압량군 내의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났다. 그 후 그가 출가한 것은 15세경이다. 그의 청년기 신라에서는, 불교는 눈부신 세력으로 일어나, 18세 때에는 분황사가 준공되고, 약 15년 후에는 황룡사구층탑이 완성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