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제9장」 육의전의 영광을 간직한 종로통으로 진출하다
24살 청년, 지물업체 사장으로 입성하다
육의전의 영광을 간직한 종로통으로 진출하다
최남, 조선 최초로 백화점을 세우다
개의 시간이 가고 늑대의 시간이 오다
「제10장」 종로 화신백화점 vs 혼마치 미쓰코시백화점
라이벌 동아백화점 인수 비결은 ‘미인계’
미쓰코시·조지야·히라다·미나카이에 도전하다 …
대화재에 휩싸인 화신백화점
한국 자본주의 메카, 종로통 상가의 풍경
「제11장」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의 진화
해외에서 맨손으로 일궈낸 근대 기업가들
조선 최고 부자 민영휘의 최후
김연수, ‘산업의 아버지’가 되다
해외 진출 1호, 조선 최고의 대기업 ‘경성방직’
‘라초이’ 접고 미국에서 돌아온 유한양행의 유일한
「제12장」 걸음마를 시작한 10대 기업의 풍경
8·15해방 전, 걸음마를 시작한 10대 기업의 풍경
해방 직후 황금알을 낳는 ‘정크무역’
상계의 기업 마카오무역에서 비즈니스를 익히다
「제13장」 8·15해방, 새로운 응전과 황금빛 기회
194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동척’의 85개 계열 기업, 폐쇄되다
‘반민反民 1호’,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이라고?
주인 없는 황금 거위 ‘적산기업’을 잡아라
국내 최대 기업 ‘미창’, ‘조운’, ‘경방’의 운명은?
「제14장」 새벽 전파를 타고 날아든 화폐개혁의 날벼락
이병철·정주영,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6.25전쟁, 재앙과 기회가 공존한 시련이었다
오사카는 밀수 본거지, 대마도 전진기지
새벽 전파를 타고 날아든 화폐개혁의 날벼락
「제15장」 1960년대 상계의 주역, 10대 그룹의 철옹성
정치권력에 줄서기가 상계의 명운을 갈랐다
적산 기업과 원조 자금, 두 번의 황금빛 기회
재벌로 가는 마지막 열차는 전후 복구
첫 국산차 ‘시발’ 서울 거리를 내달리다
구경도 못한 참치 잡으러 원양어업에 나서다
10대 그룹 삼성, 삼호, 개풍, 대한, 락희, 동
선택된 소수의 사실만이 살아남은 100년의 도전과 응전, ‘상계의 역사’
우리의 근대 상업사商業史는 일천하다. 이웃 나라만 보더라도 우리하곤 사정이 다르다. 중국은 이미 1872년부터 ‘상인을 초청해서 설립한 공기업’이란 뜻의 해운회사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 설립을 시작으로, 상업을 넘어 기업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일본 역시 민간 철도회사인 니혼철도(1881와 오사카방적(1883을 시작으로 근대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다. 그에 반해 우리의 근대 기업사는 턱없이 짧은데다 초라하기까지 하다. 20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경성방직’과 같은 근대 기업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나마 제대로 조명된 적도 없다. 왜 그랬던 걸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역사를 붙잡고 따져 물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상업사에서 기업사에 이르기까지 움터 오를 수 있는 토양이나 씨앗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땅을 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먼저 오늘날 우리의 토대를 이룬다는 조선왕조만 해도 그렇다. 조선왕조 땐 상업을 하고 싶다고 하여 아무나 상업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태조가 새 왕조를 창건한 이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으면서 일반 백성들에겐 상업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이른바 ‘억말무본抑末務本’이라는 국시를 추상같이 견지해온 까닭이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상업에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상업 활동은 백성들을 간사하게 만들뿐더러 통치 이념의 교화에도 어긋난다 해서, 심지어 농산물의 유통에까지 소극적이었다. 유교의 정신주의만을 강조했을 뿐 자본 축적의 기회에 손이 미치지 못했다. 물론 선말에 이르면 통공通共을 시행하기도 한다. 정조(1791 연간에 ‘누구나 상인이 될 수 있다’라고 선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한성의 바깥에서나 가능한 소리였다. 도성 안의 알토란 같은 상권을 제외한 찌꺼기나 다름없는 나머지곳들, 그리하여 도성 바깥으로 나가 하찮은 푼돈이나 주고받는 상거래에 한정한다는 논의에 불과했다. 왕조의 기왓장이 허물어져 내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