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행성이 주는 축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이야기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이 세계에는 청각 기관을 통해서 퍼지는 언어 형태의 바이러스가 출몰했다. 비청인들로 구성된 단체의 조직원들은 바이러스를 살포해 출근, 도축, 의자, 신, 돈 같은 개념들을 하나씩 없애기로 했다. 그들은 선언한다. 우리에게는 지구의 축복을 누릴 자격이 없고, 문명은 사라져야 한다고.
「반문명 선언서」로 문명에 멸망을 선고함으로써 시작된 책은 이내 다른 형태의 미래들을 보여준다. 「감독님, 이 영화 이렇게 찍으면 안 됩니다」에서 인류는 환경 파괴 때문에 지하로 숨어들었고, 「디어 브리타」에서 인간은 서로 기억을 공유하는 복제인간들을 만들어 행성들을 개척하려 하며, 「캠프 버디의 목을 조르고」에서는 소수자에 대한 피해의식이 퍼져 세계 인구의 절반이 줄었다.
“실망스러운 미래의 모양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는 저자의 말대로, 그의 이야기에서는 인류라는 종과 개인의 실패가 그려진다. 그러나 인물들은 멸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친구들의 미래를 위해 삶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다. 여섯 편의 이야기에서 그려지는 여러 형태의 멸망에 대처하는 인물들의 선택은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도 언젠가 ‘지금’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그린 이야기를 쓰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영영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미래는 여전히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실망스러울 것이고 나는 실망스러운 미래의 모양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 _작가의 말 중에서
현재 영상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서강범 작가는 오랫동안 영화를 공부했고 단편영화를 만들어 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 영향인지 그의 작품들은 영화처럼 전개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카메라가 돌아가 인물들을 비추고 장면이 전환되는 영화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영화를 찍지 않고도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서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