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1부 곱다랗게 기다리다
4월의 바람 10
우리를 견디게 하는 것들 13
시간의 잎으로 피어나다 17
고추장 단지를 보내니 22
곱다랗게 기다리다 27
거울에게 묻다 30
크레이지 하우스 34
습지와 늪지 사이에서 37
연꽃 터지는 소리 40
인어공주 45
기억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48
2부 손끝에서 가장 먼 곳까지
바람 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 52
골목을 걷는 시간 56
펴져라 주름살 60
날아라 실버보드 63
나는 가끔 도망치고 싶다 67
손끝에서 가장 먼 곳까지 70
누우 떼가 강을 건널 때 73
마지막 농담 76
포옹 82
슬쩍슬쩍 가슴을 때리다 85
그러지 뭐 89
3부 畵, 푸른 달을 그리다
점이 나를 만나다 95
오드리처럼 99
나비의 깊은 잠 103
도라지꽃이 피었다 109
적당한 죄 115
푸른 달에 닿다 121
선(線이 달린다 125
오타 인생 129
인체의 신비 131
수필을 스케치하다 135
책 속에서
<시간의 잎으로 피어나다>
이미경 작가는 구멍가게를 그리는 작가다. 작고 소소한 그곳에 애정을 담고 소중한 가치를 불어넣는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지나간 시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동전 하나로 행복을 살 수 있었던 어린 날이 생각나고, 요즈음 편의점과는 다른 이야기와 사연들이 신작로 가게마다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녀의 그림 중에서 ‘신의상회’가 좋아 모사(模寫를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영희가 떠올랐다.
늘 아기를 업고 있던 11살의 영희, 중학교 입학시험에 시달리던 나. 늘 살림하느라 바빠 친구가 없던 영희에게 나는 왠지 말을 걸었고, 친구가 되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학교 가는 길에 있는 영희네 구멍가게를 기웃거리곤 했다. 무슨 맛있는 과자나 신기한 상품이 새로 들어온 것이 있나 궁금해서였다. 초록색 기와에 양철 차양이 달린 그곳에는 마법 상자처럼 진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빨간 공중전화가 있었고, 가게 앞에는 평상이 놓여 있어 아저씨들은 막걸리를 마셨다. 우리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풀어놓고 술래잡기와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를 했다.
가게 옆에는 살림집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서 영희가 살았다. 어머니가 장사를 하고, 아버지는 늘 술에 절어있었다. 형제가 5남매였는데 자고 나면 동생이 한 명씩 느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집 앞에는 항상 기저귀가 펄럭거렸다. 영희는 언제나 동생을 돌봐줘야 해서 등에 업고 학교에 오는 날도 잦았다. 맏딸이라 당연히 어머니를 도와야 했고, 동생들은 고스란히 영희 차지였다. 파란 대문이 달린 그 집은 언제나 문이 열려 있었다.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영희 어머니 합천댁은 고주망태인 남편을 온종일 욕했다. 나는 그 욕을 들을 때마다 아줌마는 어디서 그런 말을 생각해내는지 궁금했다. 친구들과 놀고 있으면 우리를 향해 욕을 하기도 했다. “어서 집에 싸게 싸게 돌아가라고 ××”
11살 답지 않게 손끝이 야무졌던 영희는 그 조그만 손으로 밥을 해서 동생들을 먹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