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초판이 발행된 후 스테디쎌러로 꾸준히 읽혀온 『역사 앞에서』가, 한국현대사 전공자이자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의 자세한 해제와 본문 교주(校註가 새롭게 추가돼 개정판으로 출간됐다. 두툼한 해제에서 정 교수는 김성칠 삶을 전반적으로 개관하면서, 일기에 대한 문헌비판적 검토와 정리뿐 아니라 그의 일기에 그려진 격동하던 해방 후 모습과 급박하던 한국전쟁 초기 1년여의 실체를 객관적·역사적으로 파헤친다. 50여년 전 한반도에서 펼쳐진 미소(美蘇·남북(南北·좌우(左右의 갈등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온 한 지식인의 ‘진실한’ 일기를 따라가다보면, 2009년 지금 여기에서 반복되고 있는 ‘이념투쟁’과 ‘편가르기’ 같은 우리의 슬픈 자화상과 마주하게 된다.
김성칠의 삶과 한국 현대사의 굴곡
해제자는 김성칠이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삶과 한국 현대사를 추적·재구성해나간다. 1913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김성칠은 식민지기인 1928년 대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민족적 현실을 자각하고 좌익독서회의 세례를 받는다. 이후 대구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사건으로 1년간 미결수로 구금된 생활을 한 후,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공부한다. 이때 당대 지식인의 유일한 등용문이던 신문의 논문 현상공모(1932년 7월 동아일보 주최에서 1등에 당선된다. 이후 늦은 나이에 일본 토요꾸니(豊國중학을 졸업하고 식민지시대 조선 엘리뜨들의 양성소이던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졸업 후 식민지하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가 선택가능한 최고 직업이던 조선금융조합연합에 입사해 조합이사가 된다. 당시 이 직종은 농촌지역 3대 기관장으로 꼽힐 정도로 식민지 엘리뜨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었을 뿐 아니라 일제의 지배체제와 포섭되기 쉬운 위치였다고 정 교수는 평가한다.
김성칠은 1942년 경성제대 사학과에 입학해 직업적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때쯤 그는 『조선역사』라는 역사 대중서를 한달여 만에 써낸다. 당시 이 책은 6만 6000여부가 판매된 해방 후 최초의 베스트쎌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