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 민족 기독교의 증언록 『성서조선』
『성서조선』은 그간 기존 교회의 제도와 교리적 모순을 비판한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주창자들이 발간하던 동인지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 사사(師事한 김교신(金敎臣, 함석헌(咸錫憲,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류석동(柳錫東, 양인성(楊仁性 등 6명이 창간한 관계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다만 우리 염두(念頭의 전폭(全幅을 차지하는 것은 조선(朝鮮 이자(二字이고 애인(愛人에게 보낼 최진(最珍의 선물은 『성서(聖書』 1권뿐이니, 양자(兩者의 일(一을 버리지 못하여”에서 택한 제호가 『성서조선』이고,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근(骨筋을 세우며 그 혈액(血液을 만들고자” 하는 동시에 “넓게 깊게 조선을 연구하여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이상 『성서조선』 1927년 7월호 「창간사」에서고자 발간하기 시작한 만큼 『성서조선』에서는 민족적 색채가 두드러졌다.
민족 기업가이자 오산학교 설립자로서 나중에 고당 조만식이 “조선이 낳고, 조선을 위하여 울고 웃고, 조선을 위해 죽었으며, 시신(屍身까지 민족교육을 위해 바쳤다”고 추도한 남강 이승훈이나, 복음병원을 세워 행려병자의 치료에 나섰으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라는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는 등 성공한 의사이면서도 만년에 집 한 채 없이 병원 옥상에서 지낼 정도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장기려 등 고정 독자들 가운데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많았던 것도 그래서이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압수, 소각, 폐간
그러나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국판 36쪽 안팎에 발행 부수가 300부를 넘지 못하는 수준의 잡지였음에도 『성서조선』은 발간 초기부터 일제의 집요한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했다. 급기야는 1942년 3월호의 권두언 「조와(弔蛙」가 개구리의 소생을 통해 조선 민족의 소생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관계자가 전원 검속되고, 관련 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