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기와의 특징과 의미, 변천 과정을 한성시기, 웅진시기, 사비시기로 나누어 사상적, 정치적, 사회적 배경과 함께 살펴본다.
기와는 잘 준비된 점토[素地]를 재료로 하여 일정한 틀과 도구를 사용하여 형태를 만들고[成形], 그늘에 말렸다가[乾燥] 가마에 넣고 굽는[燒成] 일련의 체계적인 공정을 거쳐 제작된다. 기술사적 측면에서, 점토를 주원료로 하는 기와의 생산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토기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하며, 그 과정에서 습득된 흙과 물, 불의 상호작용에 대한 지식과 경험의 축적을 전제로 한다. 주거 양식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기와의 사용은 지붕에 기와를 올리기에, 충분한 건축 기술의 발전, 즉 지상(地上 건축물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한다. 여기에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물로서 기와 건물을 필요로 하는 강력한 정치집단의 출현과 복잡한 기와 제작 공정을 수행할 전문적인 와공(瓦工 집단의 조직화는 기와를 본격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된다. 또한 기와 생산에는 경제적 뒷받침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고대사회에서 기와 가마는 주로 국가적인 통제하에서 운영되었다. 그러므로 기와는 왕실이나 귀족, 승려 같은 특수 신분 집단의 전유물로서 궁궐이나 관청, 사찰 등 정치적, 종교적 성격의 건물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한국 고대사에서 기와의 제작과 사용이 가지는 의미는 고대국가의 형성과 국가권력의 탄생, 그에 수반되는 도성(都城 건설 및 정치적, 종교적 상징물 조영이라는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백제 기와에 관한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毗有王 3년(429 11월, “지진이 있었고, 큰바람이 불어 기와를 날렸다(地震, 大風飛瓦.”는 기사(記事에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 자료로 볼 때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백제에서 기와가 사용되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풍납토성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다량의 기와는 기존의 웅진~사비시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백제 기와 연구의 시간적 범위를 한성시기로 넓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