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언니는 희디흰 종이 위에 한 자 한 자
필사한 붉은 피 같은 시들을 읽어 주었다
그건 수혈이었다
흙먼지 속에서 코밑이 새까맣게
골목을 달리던 나를 따라
피톨 같은 문장들이 흘러다녔다
그녀가 나의 첫 시였다
2023년 8월
신지영
책 속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교실을 떠도는 침묵들만
사이가 좋다
작년에 있던 유령들이
올해도 가득하다
―「유령의 교실」 전문
우리들은 의심도 없이
그림자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는 가진 게 없으므로
서로 손을 잡은
모험은 건방졌다
놀이터가 조용해졌다
먹다 남은 먼지가 허공에 가득했다
―「모험 소녀」 부분
그늘 밖에는 언제나 햇볕이 있다
내 몫은 아니었지만
어젯밤 꿈에 쭈그려 앉아 담벼락에게 물었다
그늘로 지어진 구석을 나에게 주겠어?
좁고 낮은 질문이라도 키울 수 있게
―「봄눈 1」 부분
안녕
나는 네가 궁금해.
바람인 너,
골목인 너,
낮은 지붕인 너.
너도 내가 궁금하니?
우리는 서로 궁금해해야 해
그것만이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내는 일이니까
―「안부」 부분
8월의 정오
길을 가다 쭈그려 앉았다
바닥에 움츠린 채 고개 숙인
그림자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서늘하고 쓸쓸한 표정이
여름 속으로 숨었다
내가 낳은 그림자는 쌍둥이라서
얼굴이 없어도
외롭지 않았다
―「쌍둥이」 전문
가끔
생각할까
잊어야 행복할지도 몰라
날 두고 간
우리 엄마처럼
―「잃어버린 우산」 전문
우리는 친구였다
아무도 몰랐지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동안에도
반 아이들은 흔한 놀이에 열중했다
왜 너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왜 너만 고민해야 했을까
주먹을 꼭 쥔 채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나는
흔한 소녀였다
―「흔한 소녀」 부분
널 보는
순간이 매일 설레도
고백은 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