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글_한글 타자기와 나
1장 타자기라는 도전이자 기회
미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발명, 타자기 / 현대 타자기의 원형이 확립되기까지 / 타자기가 바꾼 문서 생활 / 로마자 세상 밖으로 나간 타자기 / 한자를 껴안고 ‘탈아입구’한 일본 / 일본의 ‘가나문자 운동’ / 한자와 가나를 같이 써야 했던 일본의 타자기 / 한자는 “쓰는” 것인가, “찾는” 것인가? / 그렇다면 한글은?
2장 순탄치만은 않았던 한글 타자기의 탄생
한글 타자기의 개발을 가로막은 장애물들 / 기술적 과제: 모아쓰기 / 사회·문화적 과제: 가로쓰기와 한글 전용(專用 / 글쇠가 몇 벌?─한글 타자기에서 자판 문제는 왜 중요한가 / 최초의 한글 타자기들 /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작: 1949년 한글 타자기 현상 공모
3장 타자기에 미친 안과의사 공병우
약관의 나이에 의사가 되다 / 한국의 노구치 히데요를 꿈꾸다 / 세균학에서 안과학으로 / 공병우의 성실함을 인정한 사타케 / 대학의 연구를 경험하다 / “도규계의 명랑보” / 공안과, 최초의 한국인 안과 전문 의원에서 안과의 대명사가 되다 / ‘명사’ 공병우의 사회 활동 / 의사 공병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 한글과 만나고, 한글 타자기를 직접 만들다
4장 한글 타자기 시장이 열리다
군과 타자기 (1 한국전쟁과 손원일 / 군과 타자기 (2 5·16 군사정변과 한글 공문서의 확산 / 다양하게 꽃피운 한글 타자기 시장 / 김동훈의 다섯벌식 타자기 / 장봉선의 인쇄전신기 / 송계범의 네벌식 인쇄전신기 / 시장의 성장과 분화: 예고된 표준화 논쟁
5장 공병우의 시각장애인 자활 운동과 타자기
시각장애인 재활 사업에 대한 공병우의 인식 전환과 공안과의 의료봉사 / 광복 전후 한국 시각장애인의 직업 활동 / 맹인부흥원의 설립과 맹인재활교육 / 공병우 타자기의 배제와 맹인부흥원의 고난 / 공병우의 이상은 무엇을 남겼는가?
6장 한글 기계화의 분수령이 된 1969년 자판 표준화
불발로 끝난 1950년대의 표준화 시
가장 쉽고 과학적인 문자 ‘한글’이 기계화되기 어려웠던 이유
─‘모아쓰기’라는 난제, 그리고 가로쓰기와 한글 전용의 시작
그러나 한글의 기계화는 결코 간단한 과정이 아니었다. 총 24개의 자음과 모음을 26개의 알파벳을 사용하는 로마자 타자기에 이식하는 작업이 왜 어려웠을까? 그것은 한글 자체의 ‘모아쓰기’라는 특성 때문이었다. 초성·중성·종성이 모여 하나의 음절글자를 만드는 한글의 특성상, 각 자음과 모음이 어느 자리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형태가 천차만별로 변했다. 그 모든 변화를 어떻게 모듈화하여 빠르게 입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술적 고민은 지난한 모색을 거쳐 해답을 찾아 나가야 했다.
기술적 난제와 더불어,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사회·문화적 저항이었다. 세로쓰기와 한자 혼용의 쓰기 문화는 1960년대까지도 숨쉬듯 당연했다. 한자 없이 한글만으로, 그것도 세로쓰기가 아닌 가로쓰기로 ‘생활문화’를 변혁하는 것은 가히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 과정의 한 극단에는 모아쓰기라는 한글의 특성마저 해체하는 극단적인 가로쓰기, 즉 풀어쓰기를 주장한 주시경과 ‘한글가로쓰기연구회’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타자기의 글쇠를 옆으로 눕혀 세로쓰기 문서를 타자기로 작성하는 고육책이 나타나기도 했다.
표준화 이전의 한글 타자기들
─5벌식, 4벌식, 3벌식 타자기가 내놓은 ‘한글’을 ‘한글답게’에 대한 각자의 대답
한국전쟁 후 1960년대 초반까지, 군부는 한글 타자기의 최대 수요자로서 타자기 시장의 형성을 이끌었다. 이런 변화의 혜택을 가장 크게 입은 것은 공병우의 세벌식 타자기였다. 해군참모총장이자 해병대 창설자 손원일의 후원하에 공병우 타자기는 빠른 속도로 군에 퍼져 나갔다. 공병우뿐만 아니라 김동훈(5벌식, 백성죽(4벌식 등 여러 발명가들이 고유의 메커니즘과 자판 배열을 갖춘 가로쓰기 한글 기계들을 시장에 선보였다. 타자기와 마찬가지로 자판을 써서 입력하는 인쇄전신기(텔레타이프 시장에도 공병우(세벌식 외에 장봉선(5벌식, 송계범(4벌식 등이 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