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포용을 위하여
1장 언어
2장 공공장소는 누구의 것인가
3장 “분홍색을 입혀라, 크기를 줄여라.”
4장 기술, 욕망, 인터넷
5장 해 봐
6장 옷이 날개다
7장 우리는 무엇을 장려하는가
8장 쾌유를 바랍니다
9장 ‘다른 사람들’
맺는말
미 주
저자 레베카 엔들러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이 사회가 주로 남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물론 최근에 여러 인식이 개선되었고, 많은 부분에서 전진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이 사회는 여전히 남자가 편하고, 남자가 중심이다.
저자가 제일 먼저 문제삼는 것은 언어이다. 남성중심적인 언어. 독일에서 여권 소지자를 뜻하는 Inhaber는 남성을 뜻하는 단어이다. 마를리스 크레머가 여권에 서명을 하지 않는 저항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독일의 여성들은 남성 명사의 여권 소지자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독일어 단어에는 성을 구분하기 때문에 유독 그런 표현이 많은 듯 하지만, 우리도 그런 가부장적 언어 표현에서 자유로운 국가는 아니다. 우리가 지금은 그런 표현에 조심스러워하지만, 우리도 ‘작가’라고 부르면 암묵적으로 남성 작가를 뜻하고, 여성 작가는 ‘여류 작가’, 시인은 ‘여류 시인’이라고 호칭하던 시기가 있었지 않은가. 왜 우리는 뱅크시를 늘 남성이라고 상정하고 있을까? 그것도 혹시 우리의 가부장적 사고가 빚은 결론 아닐까? 그렇게 대단한 예술가가 여성일리 없다는......
우리가 ‘다윈의 진화론’, ‘뉴턴의 법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라고 할 때 이 인칭대명사들의 공통점은 주인공들이 모두 남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퀴리의 방사성 원소’, ‘프랭클린의 DNA 이중 나선 구조’ 같은 명칭은 없다. 여성의 위대한 발견에 여성의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은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 업적이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작은 것이었을까? 혹시 우리가 가부장적 언어 구조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네델란드 여성 헤르테 피닝은 새벽 3시에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소변이 마려웠고, 남성용 소변기는 많지만, 여성용 소변기는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노상 방뇨로 범칙금을 받았다. 이 남성용 소변기는 여자들이 이용하기에는 엉덩이의 노출을 피할 수 없었고, 그 생긴 모양새 때문에 여성이 이용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판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