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까지 우리는 베블런을 어떻게 이해해왔는가
― ‘시대의 이방인’이라는 오해를 뛰어넘자 드러난 베블런의 진면목
1857년 노르웨이 이민자들의 자녀로 태어난 소스타인 베블런은 오랫동안 ‘시대의 이방인’이자 ‘올림푸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초연함’을 고수하는 오만한 천재로 알려져왔다. 《파워 엘리트》를 쓴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는 베블런을 전형적인 외부자(outsider로, 저명한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기득권에 맞서는 투박한 개척자로 해석했다. 베블런의 첫 책이자 그에게 가장 큰 명성을 안겨준 《유한계급론》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오랫동안 읽혀왔다. 미국 사회를 날카롭게 묘사한 비평서이자 우화로, 또 한계효용학파가 주도하는 주류경제학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사회학적·인류학적 접근을 모색한 책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하지만 베블런을 이단적인 학자에 머무르게 했던 세간의 인식과 달리, 베블런의 실제 삶은 훨씬 더 학계의 중심에 놓여있었다. 칼턴칼리지와 존스홉킨스대학, 예일대학, 코넬대학 등 여러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최고의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베블런은 철학과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을 두루 익혔고, 미국 최고의 연구 중심 대학인 시카고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유명 저널에 이론적 작업과 실증적 연구를 여러 편 올렸다. 1906년 봄 베블런이 스탠포드대학 경제사회과학부 교수 후보에 올랐을 때 한계효용학파 경제학자인 앨린 앨봇 영이 총장에게 한 “미국의 경제학자들 중 학문의 폭과 분석의 섬세함에서 베블런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라는 보고가 베블런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유한계급론》을 미국 사회에 대한 우화나 ‘소비의 사회학’을 다룬 저작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베블런은 당대의 미국, 즉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에서 야만 문화로의 회귀를 읽었다. 사람들이 전쟁에 익숙해지면서 약탈적 사고 습관이 부활했고, 부족주의가 연대의식을 대체했으며, 모두에게 유용성을 제공하는 것보다 남들의 시샘을 불러일으키는 행태가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