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과 서재필
서재필은 스물한 살 때인 1884년에 김옥균과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당 인사들과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실질적인 독립과 개혁정치를 이룩하고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수구세력이 끌어들인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청나라군에 진압되어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서재필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야만 했고 이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당시 휘하의 사관생도들을 지휘하여 고종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그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제와 아내는 음독자살하고, 동생은 참형을 당했으며, 두 살 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서재필 박사(doctor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미국으로 귀화한 1호 한국인이 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안 의과대학(오늘날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인턴 과정을 수학한 뒤 의사 면허증도 땄다. 서재필은 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없다. 각종 기록에서 ‘서재필 박사’라고 쓰는 것은 흔히 의사를 ‘닥터(doctor’라고 하는 데서 온 착오인 듯하다.
『독립신문』과 독립문, 그리고 다시 추방
서재필이 미국에서 정착하는 사이에 국내 정세는 급변했다. 갑오개혁(1894~1896이 일어나 개혁정치가 단행되고, 서재필 등에게 내려졌던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이로써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난 서재필은 1895년 말에 귀국하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된다. 망명한 지 12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은 백성들의 계몽이 중요하고, 개화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신문을 발행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189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창간일인 4월 8일은 오늘날 ‘신문의 날’이 될 만큼 『독립신문』의 기능은 막중했다. 『독립신문』은 최초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와 띄어쓰기를 함으로써 우리나라 한글이 보급되고 발전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