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프롤로그: 허물어지는 거짓의 바벨탑
제1부 일본군 위안소는 어떻게 설치되었나
01 일본군 위안소의 설치
02 위안부 수는?
제2부 그녀들은 어떻게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나
03 위안부 강제연행설의 형성과 득세
04 위안부 계약론의 전개
05 위안부 계약의 증거
06 정대협 증언록으로 본 ‘위안부 되기’
07 조선 내 작부와 창기가 되는 경로
08 객관적 자료로 본 ‘위안부 되기’
제3부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어떠하였나
09 업주-위안부 간 계약조건
10 위안소 영업과 위안부의 일, 소득
11 그래서 성노예였던가?
12 일본군 패주 전장의 위안부
13 위안부 학살이라는 거짓말
에필로그: 더 이상 한일 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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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이성의 말살 언저리의 한국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에 입각해 있다.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는 그 핵심이다. 1933년 나치가 ‘반(反독일 정신’ 서적을 불태웠을 때 이 개인의 근본적 자유는 함께 불살라졌다. 이후 독일은 광기의 파시즘 체제로 이행하였다. 21세기 한국도 이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강제연행된 성노예’ 이외의 의견을 내려면 목을 걸어야 한다. 직장을 잃거나 벌금형을 받거나 징역을 살아야 한다.
2013년 강제연행 성노예설의 획일성을 비판한 책을 낸 세종대 박유하 교수는 위안부 명예훼손 혐의로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6년 만인 2023년 10월 대법원에서 가까스로 무죄 취지 판결을 받았다. 2017년 대학 강의 중에 위안부가 위안부 일임을 알고서 자발적으로 갔다고 발언한 순천대의 한 교수는 파면되고 징역 6개월의 실형까지 살았다. 역시 강의에서 위안부가 매춘의 일종이라고 설명한 전 연세대 류석춘 교수는 징역 1년 형이 구형되었으며, 역시 강의에서 위안부는 생계를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들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경희대 최정식 교수는 학교 측의 징계를 앞두고 있다.
나와 상관없으니 괜찮은가? 1933년 나치가 반 독일 정신 책을 불태울 때도 많은 사람들이 별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특정 의견이 아닌, 다른 의견을 내면 처벌받는 21세기 한국은 1933년의 독일과 같이 지성과 이성의 말살 언저리에 있다.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당시의 지식은 온당한가
당신이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아마도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다음의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 마을 우물가에서 혹은 집에서 일본 관헌에 붙잡힌 조선인 소녀가 일본 침략 전장에 끌려가 위안부가 된다. 이런 소녀는 수십만 명에 달한다. 위안소에서 조선인 소녀는 일본군의 성 노리개로서 혹사당할 뿐 아니라 학대와 폭행을 당한다. 끝내 그 소녀는 고국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