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호 사건과 「희생자를 추도하는 모임」 - 7
제1부 우키시마호 사건
1. 어떤 사건이었나? - 23
2. 우키시마호 사건을 알기 위해 - 35
마이즈루라는 거리 35
귀국선이 도착한 항구 38
우키시마호가 출항한 오미나토 41
해군 오미나토 경비대가 강행한 출항 명령 46
폭침의 현장 49
남겨진 의문 51
제2부 우키시마호 사건 추도 활동의 경과
1. 몰랐던 우키시마호 사건 - 65
중학교 교사 노다 미키오 씨 66
아이들 싸움의 원인과 배경 68
노다 씨와 스나가 씨의 만남 71
조선의 문화를 배우자 72
일조협회 마이즈루 지부의 결성 74
우키시마호 사건과의 만남 75
20주년을 맞은 위령제 78
2. 우키시마호 사건 희생자 추도비를 만들자 - 80
풍화해 가는 전쟁 체험 80
스나가 씨의 성장 84
군대 생활 87
패전 그리고 시베리아 억류 88
최초의 ‘일본 귀국’ 91
전쟁은 두 번 다시 싫다 93
우키시마호 사건을 전하는 기념비를 만들자 95
겨우 결정된 건립지 98
‘희생자 추도비’를 만들기 위한 3원칙 100
‘옥신각신’, 추도비의 이미지 104
추도비는 묘가 아니다 110
3. 근본적인 질문 - 왜 우리는 추도하고 계승하는 것인가? - 114
8월 24일의 추도 집회 114
우키시마호 사건 희생자 ‘명부’와 마주치다 119
『우키시마호 사건 기록』의 간행 123
너무나도 알려지지 않은 우키시마호 사건 126
추도 활동의 전환점 131
4. 우키시마호 사건을 이야기로 전하다 - 133
(1 영화 「아시안·블루 - 우키시마호 사건」
갑작스런 방문 133
영화 <우키시마호> 제작 협력 마이즈루의 모임 137
시나리오 만들기 142
마이즈루 촬영 144
‘우키시마호 희생자를 추도하는 모임’의 출발 152
후생성 장관으로부터의 메시지 155
(2 연극 <바다를 바라보는 군상 이야기>를 만들다
스나가 씨의 교통사고 159
오미나토를
광복으로부터 열흘이 채 지나지 않은 1945년 8월 22일, 일본의 오미나토 항구에서 한 척의 배가 출항했다. ‘한국 부산항’을 향해 항해하던 이 배는, 그러나 목적지 근처에도 닿지 못한 채 출항 이틀 만인 8월 24일 일본의 마이즈루만에서 폭발해 가라앉았다. 반파된 배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은 차갑고 어두운 물속에서 “아이고, 아이고!” 외쳐댔다고 한다. 인근 해변에서 노동 중이던 마이즈루 주민들이 구조에 착수했으나, 생존할 수 있었던 피해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해당 사건이 ‘항로에 매설돼 있던 기뢰로 인한 불가항력적 사고’였으며, 이로 인해 ‘배에 탑승한 조선인 승객 3,735명 중 총 524명이 사망했다.’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입장과는 달리, 한국 시민 단체가 추산한 당시 사건의 실제 사망자 수는 최소 3천여 명에서 8천여 명 이상에 이른다. 각국이 계산한 전체 탑승객 숫자 또한 판이하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선실과 갑판까지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태워진 조선인 승객은 최소 6천여 명에서 8천여 명 이상으로, 최소치만 하더라도 일본 측이 공식 발표한 탑승객의 두 배가 넘는다. ‘촉뢰로 인한 불가항력적 사고’라는 말 역시 믿기 어렵다. 사건 발생 후 해당 함선의 운행 관계자와 오미나토항 인근 주민 등은 “처음부터 조선(부산이 아니라 마이즈루가 목적지였다.”, “조선인들을 실은 배가 항해 중 폭발할 것이며, 이미 폭탄이 설치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라며 폭발 사고가 ‘일본 정부에 의한 의도적인 자폭’이라고 진술했다.
1945년 8월, ‘빼앗긴 들에도’ 비로소 ‘봄’이 피어났건만 차디찬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한 척의 배가 있다. 이날 ‘폭침’된 배의 이름은 ‘우키시마호’. 애타게 부르짖던 ‘그날’이 왔으니, 조국을 잃어버렸던 조선인들을 싣고 그리운 ‘우리나라’로 돌려 보내주겠다던 배였다.
우리는 여전히 그날의 진실을, 그리고 돌아오지 않은 그들을 모른다.
“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