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01 개혁의 대상에서 연대의 대상으로
충무로로 넓힌 새로운 전선
한국영화 뉴웨이브 등장
영화법을 개정하라!
영화제작소 청년의 <어머니, 당신의 아들>
02 충무로 헤게모니 경쟁
기획영화와 프로듀서 시스템
대종상, 충무로 구체제와 영화운동의 충돌
부산국제영화제의 태동
영화 해방구 선언한 부산영화제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과 신구세대 결별
03 지역의 영화운동
광주 영화운동
대전 영화운동
대구 영화운동 1:영화언덕-제7예술-아메닉
대구 영화운동 2:대구독립영화협회
04 한국영화 성장의 주춧돌
한국독립영화협회의 결성
한국영화 세계화 발판, 영화운동
한국 영화운동의 개척자 홍기선을 기리며
에필로그
엔딩크레딧
찾아보기
영화를 운동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영화는 대중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종합예술이라고 하나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매력이 다분했다.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회변혁 운동의 도구로서 작용하길 바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화를 통해 약자들을 조명했고, 사회현실에 부딪쳤으며, 정치 권력에도 저항하면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려 도전했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던 이들은 노력은 하나둘 결실을 맺으며 자연스럽게 1980년 이후 한국 사회변혁 운동에 일조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들은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충무로로 상징되는 한국영화의 핵심을 이제는 초기 영화운동에 나섰던 이들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국 영화운동사는 바로 이 영화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2019년 한국영화는 100년을 맞이했다. 여기에 더해 한국 영화운동 40년을 맞는 해이기도 했다. 1979년 말에 시작된 영화운동은 한국영화의 전환을 이룬 중요한 계기가 됐다. 40년의 세월 동안 영화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시대에 맞섰던 사람들의 노력은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한국 영화운동 취재에 들어간 계기는 단편적으로 알려진 한국 영화운동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서였다. 개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파편화돼 전달되는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에는, 그 시대 한구석에서 관객으로 바라봤던 경험이 작용했다. 지난 시간의 정리가 늦어질수록 정리하는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옛말처럼 한국 영화운동에 대한 저술은 곳곳에 흩어져 있던 구슬을 수집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중략
시기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 전후부터 2000년 전후까지로 잡았다. 1980년 얄라셩 이후 1982년 서울영화집단, 1983년 서강대 영화공동체, 1984년 부산씨네클럽, 1985년 대학영화동아리 결성, 1986년 파랑새 사건 등으로 매해의 의미가 40년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