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키요모리의 조상
(2 타다모리의 지용
(3 키요모리의 탄생
(4 키요모리의 유년시절
(5 키요모리의 소년시절
(6 기온노야시로와 기온에
(7 호겐의 난
(8 부름에 응하지 않은 키요모리
(9 시게모리의 분전
(10 하리마의 카미가 된 키요모리
(11 헤이지의 난
(12 키요모리, 키슈에서 돌아오다
(13 로쿠하라로 온 주상
(14 타이켄몬 전투
(15 겐지의 멸망
(16 아쿠겐타 요시히라의 최후
(17 이케노젠니
(18 요리토모를 이즈로 유배시키다
(19 로쿠하라로 온 토키
(20 키요모리 일가의 영달
(21 뉴도 나리의 카부로
(22 편액 사건
(23 승병
(24 스케모리의 난행
(25 나리치카의 모반
(26 신위를 실은 가마
(27 메이운 승정을 유배보내다
(28 유키쓰나의 배신
(29 나리치카 들 사로잡히다
(30 시게모리의 교훈
(31 탄바노쇼쇼, 목숨을 빌다
(32 사이코 부자의 최후
(33 다이나곤의 거짓 울음
(34 키요모리, 법황의 거처로의 난입을 꾀하다
(35 시게모리의 간언
(36 시게모리 병사를 모으다
(37 유배를 떠나는 나리치카
(38 탄바노쇼쇼
(39 나리치카의 최후
(40 토쿠다이지의 이쓰쿠시마 참배
(41 키요모리와 이쓰쿠시마 신사
(42 후쿠하라의 별장
(43 쿄가시마와 온도노세토
(44 효고 쓰키시마의 전설
(45 중궁 회임
(46 홀로 남겨진 슌칸
(47 중궁 출산
(48 시게모리의 병사(病死
(49 쿠마노 참배와 쿠마노 벳토
(50 무몬의 장검
(51 등롱 대신
(52 누노히키 폭포로 들어간 쓰네토시
(53 호인 문답
(54 대신 이하의 유배
(55 유키타카의 복관
(56 어전을 옮긴 고시라카와 법황
(57 타카쿠라 상황, 이쓰쿠시마로 가다
(58 타카쿠라노미야 모치히토 왕
(59 탄로 난 모반
(60 하세베 노부쓰라
(61 이즈의 카미 나카쓰나의 말
(62 와타나베 키오우
(63 몰려든 다이슈
(64 피리,
무사계급(사무라이의 대두와 함께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쥐었던 인물
일본의 역사를 돌아보면 중세와 근세는 무사들의 시대였다. 교토에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조정가 엄연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정치를 행한 것은 쇼군을 중심으로 무사들이 세운 무가정권(막부이었다.
그러한 무가정권을 공고히 하여 약 700년에 걸친 무가정권을 이어갈 수 있게 한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였으나, 무가정권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은 다이라노 기요모리였다.
애초에 무사들은 귀족의 호위(사부라이, 侍를 맡거나 지방의 장원을 경비(쓰와모노, 兵하는 정도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실력을 키워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실권을 쥐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 다이라(平 집안과, 미나모토(源 집안이었다. 중앙정부의 귀족들은 이때 이미 부패하여 자신들의 힘으로는 지방에서의 봉기는 물론 중앙에서의 세력 다툼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해져 있었다. 이에 결국은 무사들의 힘을 빌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무사들의 세력을 키우는 가장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무사들의 시대가 도래하자 두 집안(겐페이은 권력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는데 이 다툼에서 최초 승리를 거둔 것이 헤이케(다이라 집안였으며, 그 무사집단의 우두머리(동량가 바로 다이라노 기요모리였다. 정적을 제거한 기요모리는 곧 자신의 세력을 더욱 키워 결국에는 무가정권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요모리의 너무나도 빠른 출세와 전횡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질투를 사게 되었고 결국에는 미나모토 씨의 반격을 받아 두 집안의 전세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기요모리는 겐지(미나모토 씨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헤이케의 멸망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의 죽음이 헤이케의 멸망을 재촉한 것이리라.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대한 전기 대부분이 겐지의 전성기에 쓰인 것이기에 그에 대한 평은 별로 좋지 않았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