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862년 농민항쟁과 시위문화
민중운동과 시위문화|저항의 단초|집회: 논의와 의결|동원과 행진|결집과 공격|시위의 확장과 농성|노래와 깃발|민중 시위에 대한 평가
동학농민군의 저항문화
의로운 깃발을 들다|펄럭이는 깃발들|역사의 불꽃, 저항의 축제|칼춤 〈칼노래〉를 부르다|동요가 퍼져 나가다
3·1운동, 들불처럼 번진 만세소리
3·1운동에는 초기 ‘지도부’가 있었다!|도시가 촉발하고 농촌으로 확산하다|만세시위의 주인공, 민중|‘지금 여기’와 만나는 시위문화|세계인 모두가 3·1운동에 감동했을까?|3·1운동이 꿈꾼 민주주의
4월혁명과 6·3항쟁의 학생 시위문화
‘질서’의 전유와 전복, 4월혁명|저항 연행의 창출, 6·3항쟁|1960~1970년대 학생운동의 문화적 우회로
도시의 새로움, 정치의 새로움: 2008년 촛불집회
쇠고기와 정권 퇴진 사이에서|촛불과 민주주의|수도 서울의 정치학|풍자를 넘어서|행복의 불안 또는 불안한 행복
파리코뮌과 공동체적 인간의 자유
사건과 기억|애국에서 자유로|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축제|파리코뮌은 비극이 아니다
‘혁명의 거리, 광장의 정치’: 시위문화로 보는 러시아혁명
시위문화와 러시아혁명|러시아제국의 상징, 겨울궁전의 희비극|혁명의 거리, 광장의 정치|깃발과 상징|‘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상징혁명’
이미지의 투쟁: 스페인내전기 공화진영의 ‘혁명’과 선전 포스터
‘벽에서의 외침’: 스페인내전과 선전 포스터|공화진영의 전쟁 이미지 1: 인민들의 세계|공화진영의 전쟁 이미지 2: 희생자와 수호자|공화진영의 ‘혁명’과 스페인내전의 기억들
68혁명과 시위문화: 저항으로서의 축제, 축제로서의 저항
68, 새로운 혁명|새로운 시위문화: 저항과 축제, 축제와 저항|68의 의미를 묻다: 21세기 시위와 68의 유산
주
참고문헌
거리와 집회, 사람을 모으다
시위는 집단적 참여, 행진, 연좌, 농성, 진입 등 모든 과정에서 거리를 기반으로 한다. 인파가 시위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지만 무리를 모으면서 시위 장소로 행진해 나아가기도 한다. 시위 장소에서는 토론, 연좌, 농성 등의 방식으로 행동이 이루어지며, 특정한 목표 장소를 향한 진입과 점거도 하게 된다. 널리 알려진 파리코뮌의 바리케이드도 전쟁 수행만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길이었다. 1862년 농민항쟁 때 길을 차단하고 검문한 사례가 있듯이 시대나 지역을 막론하고 길거리를 비롯한 장소를 장악하는 것이 시위대의 의지를 드러내는 기본 방법일 것이다.
이처럼 저항의 장소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건이든지 ‘지리적 장소’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장시는 우리나라에서 3·1운동까지도 중요한 시위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근대 도시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상황에서 도시는 통치자의 공간에서 시민과 학생 등이 일상을 영위하는 생활공간으로 변화해 나갔다. 거리는 개방되었기에 권력의 공격을 받을 위험도 있지만, 공개된 영역이었기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68혁명의 “정치는 거리에 있다”라는 구호는 매우 상징적이다. 이처럼 공간이 투쟁의 현장이 되었을 때, 그곳은 통치자가 엄격하게 관리하던 곳에서 대중이 함께 즐기며 민중의 저항문화가 샘솟는 축제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또한, 시위문화에서 집회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1862년에도 주막이나 사랑방 등 폐쇄적이거나 한정된 공간을 이용했다. 1871년 파리코뮌 때도 사상, 결사, 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클럽과 같은 모임을 활용했다. 3·1운동에서 집회는 대부분 곧바로 시위로 연결되었으니 시위를 위한 집회인 셈이다.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과 사람이 직접 소통하고 함께함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집회가 중요하다. 모임 자체가 축제이며 이런 축제를 경험함으로써 자발적 참여를 확대해 나갔다.
깃발과 포스터, 대중을 사로잡다
선언문, 격문, 신문, 잡지, 그리고 깃발이나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