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후기
제1부 군부의 성장과 파벌의 형성
군부의 대두
근대국가의 형성과 군부
군대의 제도화
죠슈와 사쓰마
국방충실화 계획의 좌절과 군축
우가키벌과 사가벌
제2부 새로운 군부 세력의 등장 - 5 15사건과 2 26사건
전후파 장교들의 세력화
잇세키회(一夕의 결성
만주사변
아라키의 등장
5·15사건
황도파와 통제파
중심없는 육군대신과 황도파의 폭발
엘리트 장교와 ‘청년장교’
2·26사건
제3부 군부파시즘의 등장과 침략전쟁
히로타 내각의 실세, 테라우치 육군대신
군 출신 수상의 3류 정치
젊은 귀족 고노에에의 기대와 실망
중일전쟁의 확대
공안통 법조관료 내각의 외교 실패
단명의 육군내각·해군내각
고노에의 재등장 귀족 정권의 한계
제4부 태평양전쟁과 패전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패전으로의 길
육·해군 협력내각과 ‘옥쇄’의 연속
패전 - ‘일본의 가장 긴 하루’
전쟁의 책임과 전범
책 속에서
수상의 용태는 점점 악화되어 그날 밤 11시 26분 절명했다. 이 사건을 5·15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24년 6월의 가토 타카아키(加藤高明 내각 이래 8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정당정치의 토대가 붕괴되었다. 그리고 약 4년 뒤인 1936년 2월 육군을 중심으로 일어난 쿠데타 미수사건(2·26사건을 거치면서 일본정치는 혼돈의 늪으로 빠져든다. 결국 군부 파쇼정권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전쟁 확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12p
이러한 상황에서 후타바회는 회합을 열고 육군으로서의 대응과 관동군 고급참모 고모토 대좌에 대한 구제책을 협의하였다. 이것이 육군 내부에 있어서 하극상 풍조의 출발점이 된다. 다른 의미에서 1929년은 후타바회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63p
아라키는 이들과 격의없이 어울리며 이들을 자기 세력화해보려는 의도와 이들을 통제해보려는 생각, 어느 쪽이었는지, 두 가지 생각 모두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결국은 이들에게 자중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 결과 이들로부터의 인기도 떨어지고, 이들을 통제하는데도 실패하였다. 이 상황이 되자 아라키는 육군대신을 사임하고 만 것이다. 수년 후 이들 ‘청년장교’들이 2·26사건을 일으킨다.
-122p
사건이 진압되고 오카다 내각은 총사직하였다. 앞으로의 사태 수습을 담당할 후임 수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정계에는 ‘군부에 반항하면 죽는다’는 분위기가 생겨 수상을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카리스마 넘치고 소신있는 지도자는 더욱 위험하다. 만일 이러한 지도자가 군부와 충돌한다면 또다른 비극을 불러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괴물 집단으로 변해버린 군부, 특히 주도권을 잡고있는 좌관급 참모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정부 관료들을 이끌고 갈 능력을 갖춘 지도자는 별로 없었다.
-13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