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공포
새커는 먼저 자신의 관심사가 문학과 영화 등에서 한낱 인간적 두려움으로 제시되는 공포를 주제로 하는 ‘공포의 철학’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가 말하는 공포는 인간의 사유의 한계에 직면하여 사유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려 할 때 나타나는 어떤 것이다. 예컨대 기후위기와 전염병, 대량 멸종 사태 등으로 점점 가시화되는 ‘우리-없는-세계’, 즉 더 이상 지구가 아닌 것으로 나타나는 ‘행성’에 대한 사유를 들 수 있다. 그가 굳이 “철학이 비철학적 언어로만 표명할 수 있는 저 사유 불가능성의 사유”를 추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범지구적 재난, 유행병 출현, 지각변동, 이상기후, 기름 덮인 바다 풍경, 은밀하지만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멸종 위협 등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철학이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틀 바깥에서 사유할 필요성이 절박해졌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적 종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오늘의 세계는 카뮈가 말한 인간에게 무관심하고 냉담한 우주를 넘어 인간 혐오적으로 나타나기까지 한다. 이러한 비인간적 세계의 문제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철학적 세계관이 빠져있던 인간 중심적 이해의 틀 바깥에서 사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새커의 문제의식이다. 이를 위해 인간과 생명이 사라진 별들의 시체로서의 ‘행성’적 관점을 끌어들이고,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로서의 악마, 마녀, 검은 촉수의 괴물을 탐구하는 그의 시도는, 인간을 지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공정하고 보편적인 시각에서 정의하기 위해 외계인의 관점을 끌어들이며 SF를 탐구한 바 있는 페테르 센디의 《외계의 칸트》를 떠올리게 한다.
2011년에 나온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 더욱 시급해진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 유행병과 기후 위기를 우주적 공포로 해석하면서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사유할 것을 촉구하는 이 책은 철학적 비관주의에 관심이 있는 인문서 독자뿐만 아니라, 호러 장르를 창작하거나 연구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호러를 깊숙이 알고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