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이 책을 여러분 앞에 내놨다
기축옥사, 새로 쓰다!
차례
<발간사> 우리 역사의 민낯 … 기축옥사 실세 드러내다
유성룡과 임금 선조의 정치
기축옥사 어떻게 볼것인가?
기축옥사는 누가 주도했나?
서인인가 동인인가? 동인도 다 같은 동인이 아니었다
기축옥사, 누가 언제 주도했나?
조헌의 상소와 호남유생들의 상소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나?
주류 동인을 겨냥한, 조헌과 호남유생들의 상소
천민을 양민화 하는 개혁적 국방정책에 반대를 위한 반대
1년만에 드러난 일 - 광해 세자책봉
멈추지 않은 서인들의 호소
희생자는 누구인가? 주류 동인? 비주류 동인? 서인?
과연 ‘동인 1천명’이 희생됐을까?
희생자는 오히려, 비주류 동인과 서인들
기축옥사, 그 역사의 중심에 선 동인
이발의 노모와 어린자식을 누가 죽였나?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누가 죽였나?
‘최영경’의 죽음 논란
기축옥사 기간에 벌어진, 서인 탄압
임진왜란 직전, 정사 황윤길-부사 김성일 엇갈린 보고
기축옥사 중간 1년 동안, 서인 탄압 희생자 속출
전라도에서 계획됐다는 모반, 왜 황해도?
기축옥사 뒤 정치는?
임진왜란과 송강 정철
전쟁 중, 죽은 정철에게 가해진 동인들의 공세
기축옥사에 대한 냉혹한 평가
끝나지 않은, 역사왜곡
왜 송강 정철은 기축옥사 주도자로 몰렸나?
끝나지 않은, 역사왜곡
기축옥사 등 관련 인물들
참고자료
책 속에서
송강 정철에게 주어진 권한과 주도권이 ‘동인’에게로 넘어간다. 기축옥사가 발발하고 두 달 지난 뒤다. 정암수 상소, 양산숙과 김광운 상소, 조헌 상소 등 몇 가지 사건이 빌미가 됐다. 12월 8일 이후 급작스런 변화였다. 임금이 서인과 주류 동인을 인식하는 시각이 완전히 바뀐다. ‘유성룡 이산해는 금옥처럼 아름다운 선비’로, 송강 정철과 서인은 ‘악한 것들’로 바뀐다. 12월 14일부터 임금이 서인을 겨냥해 가시 돋친 말을 쏟아냈다. 그 말 속에는 “해괴하다”, “의심된다”, “죄를 물어라!”, “정철의 손에서 나왔다”, “인심의 패역(悖逆함”, “이 지경에 이르렀다”, “웃을 일이다”, “간귀(奸鬼이다”, “경멸한다”, “날뛴다.” “마천령을 넘게 될 것”, “체차하라!”, “추고하라!” 등 부정적인 말 일색이다. 반면 동인인 유성룡에 전한 말은 무한한 신뢰의 발언들 이었다. “백유양 초사가 경(유성룡에게 무슨 관계 된단 말인가”, “경은 금옥(金玉처럼 아름다운 선비다”, “경의 심지(心志를 저 태양에 묻는다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것임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조금도 개의치 말라”, “마음을 편안히 가지라”는 따뜻한 메시지 일색이다. 이는 서인 정철 중심에서 동인 유성룡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 메시지였다.
--- p.40, 「기축옥사 발발 두 달 만에 유성룡 부각」중에서
송강 정철이 동인들의 함정에 빠진 ‘건저문제(왕세자 책봉문제’로 1591년 윤3월에 파직된다. 송강 정철은 큰 위기에 몰리고, 서인들이 동인들에 의해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다. 중앙 요직에 있던 거의 모든 서인들이 탄핵의 대상이 된다. 정철과 가까운 서인계 인사들은 거의 모조리 ‘음험하고 간사한 무리들’로 치부돼 옷을 벗어야 했다. 정철의 문하생이거나, 정철을 두둔하거나, 동인들에게 대들거나 하면 여지없이 체직시키거나 귀양을 보냈다. 대대적인 탄압이었다. 당시 송강 정철은 ‘간신’ 취급을 받고 있었다. 1591년 7월, 정철의 모함에 얽혀 배척받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