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5
1장. 십자군과 기사단의 탄생 19
십자군 입성까지의 예루살렘·19
예루살렘 왕국과 십자군 국가들의 건국·24
아말피 상인과 병원, 그리고 수도회의 창립·26
종교기사단이란?·31
두 기사단의 활동과 차이점·37
기사단의 요새들·43
기사단의 재정기반과 조직·52
성 라자로 기사수도회·54
성지에서의 구호기사단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현지화·55
2장. 성지의 수호자 61
아스칼론 공방전·61
뒤 퓌의 죽음과 이집트 원정·62
살라딘의 등장과 아모리 왕의 죽음·69
구호기사단의 첫 위기와 문둥이왕 보두앵 4세·71
예루살렘 왕국의 분열·74
하틴의 대참사·76
백척간두에 선 기사단과 십자군·87
아크레 공방전·96
사자심왕 리처드의 등장과 아크레 탈환·101
아르수프 전투·106
야파의 수복과 전진 그러나…·112
리처드의 퇴장과 강화·117
3장. 성지에서 물러나는 기사들 125
2기 예루살렘 왕국 시기의 구호기사단과 4차 십자군·125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난 오랜 내전과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129
복잡한 분위기에서 태어난 5차 십자군 그리고 이집트 원정·132
허무한 패전·139
프리드리히 2세와 6차 십자군·142
찝찝한 성도 ‘탈환’·148
15년 동안의 막간극: 롬바르디 전쟁·154
라 포비 전투: 재현된 하틴의 참극·159
성왕 루이와 7차 십자군·163
다시 시작된 내전: 성 사바스 전쟁·174
몽골이 몰고 온 태풍 그리고 아인 잘루트 전투·177
바이바르스의 연전연승·181
8, 9차 십자군의 실패와 크라크 데 슈발리에의 함락·184
암살단과 두 기사단·191
말기의 우트르메르 그리고 몽골과의 ‘동맹’·193
악운의 1282년, 그리고 마르카브의 함락·199
함락 전야·204
아크레 함락되다!·208
십자군의 실패 원인·216
4장. 로도스의 콜로시안 219
재기를 노리는 두 기사단 그러나…·219
성지 그리고 지중해에서 500년 이상을 싸우고 버틴 경이로운 조직!
1099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1차 십자군에는 종교기사단이라는 조직이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사와 군대가 유럽으로 돌아가고, 남아 있는 이들이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십자군 국가들을 세웠지만 그들의 숫자는 너무나 적었다. 왕국의 방어와 순례자들의 보호를 위해 성전기사단이 생겨났고, 예루살렘에 있는 성 요한 병원의 경비를 위해 구호기사단이 탄생했다. 이 두 기사단은 교황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고, 예루살렘 왕국의 상비군으로 맹활약했으며, 사실상 나라 안의 나라로까지 인정받기에 이른다.
한편 십자군 세력은 너무 복잡하고 이해관계도 달라 숱한 내분을 겪어야 했고, 결국 1187년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에게 대참패를 당하고 예루살렘은 물론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만다. 이런 호된 시련을 겪었지만 십자군 세력은 단합하지도, 현지에 뿌리박는 데도 실패했고 결국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성지에서 축출되고 만다. 물론 구호기사단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프랑스에서 멸망한 성전기사단과는 달리 로도스섬을 차지하면서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어엿한 주권국가로 자리잡는 성과도 거두었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 기사들의 다양한 국적 역시 기사단의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구호기사단은 영지경영, 이슬람 선박에 대한 습격, 해안 공격, 순례자에 대한 의료지원 등을 병행했고, 맘루크와 오스만의 대규모 공격도 저지하면서 두 세기가 넘는 세월을 버텨내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522년 술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십만 대군의 반 년 가까운 총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협상 끝에 명예로운 철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몰린다.
호된 방랑 기간을 보낸 구호기사단은 척박한 섬 몰타에 세 번째로 정착했고, 다시 오스만 제국에의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1522년, 분노한 술레이만이 보낸 대군을 맞아 넉 달 간의 혈전을 벌인 끝에 역사적인 승리를 가두어 전 유럽을 감동시키는 위업